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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츠카] 명명(命名)

* 앙스타 꽃말합작 (https://henaho3.wixsite.com/collabo) 에 참여한 글입니다. 주최해주신 홍진 님, 다른 참여자분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오우 츠카사는 종종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죽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상태로 그저 사라진다는 것… 사람들의 곁에서, 세상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는 것. 차츰 느려지던 걸음이 뚝 멈춘 것은 유명 코스메틱 브랜드의 광고가 걸린 전광판 앞에서였다.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우아하게'. 자신의 이름을 본딴 카피와 함께 화장품 병을 들고 있는 화보 속 사람은 한때 저와 같은 유닛의 멤버였던 아라시였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나루카미 선배. 누님이라고,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호칭을 몇 번 되뇌이다가 이내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내젓고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이츠의 막내였던 제가 졸업을 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꿈꿨던 아이돌은 아니지만,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집안에서도 대학을 마치면 연예계 생활을 재고해주겠다는 답을 받았고, 동고동락했던 선배들과도 여전히 연락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들 찬란한 이십 대의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본업인 모델로 돌아간 이즈미와 아라시도, 그리고 방송인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리츠도. 자취를 감춘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어쩌면 모두가 예상했을. 오랫동안 연락이 닿았더라면 오히려 생소했을 그 사람, 츠키나가 레오.

 Leader.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은 이름이 한겨울의 공기 속으로 새하얀 입김이 되어 사라졌다.


 종횡무진, 늘상 좀처럼 종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연습에 빠지면 빠지나 보다, 또 어딘가에서 곡이라도 쓰고 있는 모양이지, 우리끼리 연습하자….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들 모두에게 왕의 부재는 존재보다도 익숙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왕이라는 호칭도, 기사단이라는 이름도 그저 허울 좋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언젠가의 제가 청춘을 바쳤던 곳이며, 마음을 다해 노래했던 이름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분명 - 그 시절의 전부였겠지. 나의 나이츠,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은 츠카사에게 맹세코 단 한 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다. 그토록 소중한, 차라리 몸의 일부와도 같았을 것과 그리도 오래 떨어져있었을 그를 생각했다. 홀로 울고, 아무도 거둬가주지 않는 눈물을 닦고, 그럼에도 웃으면서 악보를 내밀고… 이런 건 Leader를 위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언젠가 진심으로 따져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에,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던 시절의 저는 울었던가.

 내 나이츠를 위한 일이잖아.

 그건, 당신의 청춘을 바친 이름이 아닙니까. 끝내 당신의 이름은 될 수 없어요. 끌어안을수록 스스로를 축내는 일이라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그 말에 저의 없는 초록색 눈동자로 이쪽을 건너다 보며,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스오. 내가 만든 나이츠는 결국 나의 이름이 될 텐데.

 스물 둘의 스오우 츠카사가 기억하는 열일곱의 츠키나가 레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머무를 곳을, 이름을 열렬히 찾아 헤매던.


 그 무렵 츠카사는 레오에게 꽃을 사다 주기 시작했다. 이건 Iris… 붓꽃입니다, Leader. 꽃말은 사명이에요. 시들 때까지만이라도 소중히 간직해주세요. - 응, 고마워! 스오로부터의 선물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혹시 시들어버린다면 내가 이 녀석을 위해서 곡을 쓸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는 정말로 붓꽃의 노래라는 제목의 곡을 완성했다. 방음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처음으로 신곡을 공개한 그는, 하나뿐인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해, 스오. 세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감정이 있잖아? 그 중에서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건 사랑이야. 참으로 그다운 고백이었다. 건반의 잔향이 사라지지 않은 음악실에서 츠카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저도 Leader에게 비슷한 걸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제야 저다운 얼굴로 웃으며 좋아해, 사랑해, 스오! 라고 외치면서 꼭 끌어안던,

 그런 열일곱의 츠키나가 레오.


 지금의 당신을 찾고 싶다. 문득 격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 당신이 쓴 곡이라도 좋고, 미완의 악보가 그려진 오선지라도 좋으니까, 당신의 흔적과 마주하고 싶어. 연말의 거리는 조용하지만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등 뒤에서는 아라시가 우아한 미소로 저를 지켜보고 있다.

 순간 근처에 있던 대형 음반 상점이 눈에 띄어,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떻게 이름을 바꿨어도, 어떤 식으로 얼굴을 가리며 목소리만을 내보내고 있어도 나는 틀림없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홀린 듯 서브컬쳐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온갖 난해한 프로듀서명이 적힌 앨범들을 찬찬히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이따금 그의 앨범도 눈에 띄었다. 아, 이건 졸업할 때 받았던 음반이고, 이건 세나 선배가 들려주셨던…. 하나하나 떠오르는 추억들 속에 진짜 찾고 싶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저는요. Leader.

 제가 알고 있는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당신을…. 그때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바뀌었다. 조금 늦은 캐럴들 틈새에서 틀기에는 조금 동떨어졌다 싶은, 피아노로만 구성된 유려한 곡이었다. 진열된 앨범들 위를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일순 뚝 멈췄다. 우연찮게 집어든 앨범의 표지에는 검은색 바탕 위에 은색으로 'ハナアヤメの歌(붓꽃의 노래)'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어째서인지 꾹 참고 있었던 숨이 한순간에 터져나왔다. 작곡가의 이름도, 노래를 부른 소프트웨어의 이름도, 말 그대로 그 무엇도 적혀있지 않은 표지였으며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을 곡이었으나,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츠키나가, 레오."


 그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잊고 있었던 이름, 어쩌면 당신조차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몰랐을 그 이름이었다. 붓꽃의 노래. 유명 작곡가의 미공개 곡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설렘에 들뜨던 그 시절처럼, 이름 아닌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던 츠카사가 휴대폰을 꺼내들어 그의 앞으로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스오우 츠카사입니다. 사실은 말씀 드리지 않은 게 있었어요. 붓꽃의 꽃말에는 기다림도 포함된다는 걸, 사랑의 메세지도 담고 있는 꽃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타이핑을 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손을 멈춰야만 했다.


 사실은 쭉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지금 당신의 노래를 듣고 있어요. 붓꽃의 노래…. 한때는 저만이 알고 있었던 그 곡을.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원망하지는 않아요. 이건 원래 당신의 노래였으니까.
 그래도, 그렇지만… 혹시 지금도, 저를 좋아한다면. 만에 하나, 제게 들려주기 위해서 이 곡을 정식 발매한 거라면.

 제가 사랑하는 츠키나가 레오, 그럼 다시 나타나주시겠어요?

 
 어려운 문장도 아니었건만, 오히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그 내용을 다 치는 데만도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지나치게 심플한 표지의 디자인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계산대로 가져갔다. 결제를 하는 동안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여전히 가게 안에서는 그의 노래가,

 이제야 이름 붙일 수 있게 된 청춘 한가운데의 츠키나가 레오와 스오우 츠카사를 닮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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