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_전력
17차 전력 주제 : 식탁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그 저택은 예전부터 온갖 흉흉한 소문의 근원지였더랬다.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본 사람은 많은데 나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든가, 밤이 되면 아름답게 피어나는 정원의 온갖 꽃들이 떠오르는 햇발을 받으면 금세 시들어 흉하게 변한다든가. 사람을 홀리는 악마가 산다고도 했고 흡혈귀가 살고 있다고도 했었다. 아예 누구도 살지 못하는 집이라고도 했다. 해가 떨어지고 저택 앞 화원의 장미가 만개하면 이층에 있는 통유리창에도 불이 밝혀지곤 했으나, 그마저 유령의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싶은 세속적인 호기심이 살을 붙인 이야기이다. 그 유리창 안에 바깥 사람들을 해쳐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 소년이 밤마다 손으로 유리를 짚고 밖을 내다보는 줄도 모르고.
엄밀히 따지자면 빈 집은 아니었다. 누구의 명의인지는 몰라도 아침이면 온갖 서류며 시덥잖은 광고물 따위가 산처럼 쌓이는 우편함이 금세 말끔히 비워지는 것으로 보아 빈 집으로 유추할 거리는 없는 셈이었다. 공공연한 담력시험장으로도 통하는 이곳까지 굳이 걸음해서 매일같이 우편함을 비우는 수고를 일일이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으니.
카게히라, 우편물 좀 가지고 와주겠느냐.
우편물을 거둬가는 것은 밤이면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종종 그 자세로 잠이 들어버릴 때도 있는 소년의 몫이었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색도 서로 다른 눈을 빛내며 군말없이 서류봉투를 날라다 주는 그의 머리 위로 얹히는 것은 또 다른 이의 손이었으며 싱긋 웃어주는 것은 보라색의 두 눈동자였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건만 환하게 지어보이는 웃음은 '그런 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 내보이지 않기에는 너무도 아까웠으나 그건 그것대로 그 남자가 좋아할 법했다. 저택의 실 소유주이자 그 아이의 보호자를 겸하고 있는, 키가 크고 신경질적인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을 꿰뚫어볼 듯 날카로운 눈은 오로지 단 한 사람 - 그가 카게히라, 라고 부르는 이에게만 더없이 따스했으며 그의 모든 부드러운 부분은 오직 그 사랑스러운 소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짝이 맞지 않는 한 쌍의 유리구슬을 다만 아주 정성스럽게 맞춰넣은 듯한 그 눈이 오직 그만을 위해 웃어주듯이.
그들이 처음부터 이처럼 서로만을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여느 구전동화들이 그러하듯 이 또한 출처와 원래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과 입을 거치며 바쁘게 수정되고 각색되었을 테니. 사람에 따라 백 년 전이라고도, 불과 얼마 전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어느날'부터인가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에는 사람을 수집하는 공작이 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수집이라는 말에 걸맞게, 겉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면 안되며, 되도록 '미완'인 나이대의 아이들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면서 거리에서는 아이 뛰어노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 덕택에 밖에서 감기가 옮아오는 것은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어른들의 자체 검열 탓에 영문도 모른 채 각자의 집 안에 감금되어버린 모양새였다.
그 정체불명의 수집가에 대해서도 물론 말이 많았다. 마을에서 알아낸 것은 기껏 그의 이름이 전부였다. 이츠키 슈, 그것이 그 기벽에 찬 사람의 이름이라 했다. 오백 년을 넘게 산 인외의 존재라는 둥, 아이들에게 흑심을 품은 게 들통나 집안에서 쫓겨났다는 원색적인 말은 물론 그 안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경멸 어린 비난이 뒤따랐으나 그러한 여론이 무색하게끔 사라졌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말짱하게 살아돌아오곤 했다. 어차피 어린 시절에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해도 누구 하나 오래 울어주지도 않았을 무연고의 아이들이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무안함에 저택의 주인이 파렴치한 납치범이라는 모종의 실마리라도 잡고자 그간의 생활을 캐물었을 때는, 악의적인 대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행색도 한결 사람다워졌고, 고결한 자태마저 느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건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때껏 베일에 싸여있던 남자는 종종 마차를 타고 밤 외출을 나서곤 했다. 촘촘하게 짜인 검은색 베일로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옆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목격담이 묘사하는 생김새와 액면가만은 같았다는 점에서 또 다시 가십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 옆에 늘 동행하던 검푸른 머리의 소년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밤의 어둠을 닮아 검은색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마차 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광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았더라면 누구라도 그저 빈 좌석의 그림자나 잘 보더라도 실물 크기의 정교한 인형쯤으로 간주했으리라. 차양 안에서 바로 곁에 앉은 사람에게 그토록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줄은 모르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환히 웃는 줄도 모르고.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열아홉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날까지는 떠나야만 한다. 그것이 이곳의 철칙이었다. 이때껏 누구도 그걸 어긴 적이 없었다. 단 한 사람, 카게히라 미카만큼은 예외가 될 모양이었지만.
저로부터 독립시킬 금전적 준비는 완벽했으나 어째서인지 마음이 아직이라고 선을 긋고 있었다. 미카 역시 곧 떠나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게, 조금이라도 더 손을 타는 아이처럼 굴면서 어떻게든 유예를 받으려 애쓰는 눈치였기에.
"스승님, 내 이건 어떻나…?"
슈는 종종 미카에게 새 옷을 만들어 선물했다. 본래부터 손재주는 뛰어났다지만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입을 사람과 장소에 기가 막히게 잘 맞아들어가는 옷들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고급 양장점의 쇼윈도에 가득히 채워지는 편이 덜 이상했을 그 컬렉션은 정작 냉기마저 감도는 마네킹이 아닌, 피가 돌고 심장이 뛰는 그가 수집한 아이들에게 걸쳐졌지만. 이때껏 수많은 아이들이 거쳐간 만큼 슈의 작업실에는 수백 여개의 러프와 온갖 진기한 원단이 가득했다. 미카가 호기심으로 그 방을 드나들며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혹은 이미 작아져 입지 못하게 되어버린 옷들을 제게 대어보거나 입어보려 들 때면 슈는 냉큼 줄자를 가져와 그 아이의 치수를 재었다. 그러고 나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마법처럼 새로운 옷이 마련되어있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오로지 저 하나만을 위한 의상을 선물받은 미카는 늘 세상을 한품에 가진 얼굴로 웃어보이곤 했다. 슈는 쓰라린 마음을 한구석에 감춘 채 부드럽게 웃으며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 아이에게 작아진 옷들도 작업실로 들어오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두 번 다시 이 아이의 치수와 외양과 성격에 맞춘 옷을 만드는 일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수십 번도 넘게 겪어온 이별이건만 미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누구를 만난다 해도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예 다른 이에게 저택의 문이 열리는 일 자체가 없으리라. 이 아이는 저로 하여금 정이라는 걸 붙이게 만들어버렸으니.
모두 부질없는 감상임을 알고 있었으나, 눈앞에서 제가 만들어준 고딕풍의 옷을 입고 공연히 한 바퀴를 빙 돌아보이는 미카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시간을 멈춰 영영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꼭 끌어당겨 안았다.
"사랑스럽다, 카게히라."
"…으응, 잘 어울리나?"
"그런 세속적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야말로 기적 같구나."
"그럼 내도… 그, 스승님이 잘 쓰는 말 중에… 트레비앙? 그거가?"
"그래. 정확히는 그 말로도 부족하다만… 마음에는 드는 겐가."
응, 당연하제! 햇살처럼 웃어보인 아이가 제지할 틈도 없이 곧장 차려진 식탁 앞으로 달려가 제 자리에 착석했다. 기어이 새 옷을 입고 식사를 하겠다는 통에, 조심히 먹어야 한다는 몇 번의 당부에 이어 무릎에 냅킨을 깔아주고 나서야 겨우 손을 뗄 수 있었다. 미카가 포크를 든 손을 움직일 때마다 활동성을 고려해 최대로 절제한 소매 끝의 레이스가 가늘게 흔들렸다. 한참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던 미카가 문득 입을 연 것은 접시를 거의 비워가던 찰나였다.
"근데, 있제. 스승님."
"얘기하거라."
"이거, 졸업 선물 아이제?"
이곳에 온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하루 전까지는 떠나야만 했다. 그걸 암묵적으로 졸업이라 일컬었고, 슈는 때가 되어 떠나는 이들에게 여태껏 중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주곤 했기에. 제비꽃색의 눈동자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미카는 포크를 비스듬히 세워 애꿎은 아스파라거스를 으깨려 들었다. 뭔가를 참는 듯 악다문 이가 눈에 들어왔다.
"카게히라, 그건 그냥 옷이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어서 식사나 마치도록."
"그래도 언젠가는, 내도 떠나보낼 기제?"
"…."
"나즈나 형은, 어른이 되었겠제."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니토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고 제법 능숙한 편이었으니, 지금쯤 어느 극단에라도 들어가 있겠지."
"스승님은 나즈나 형을 잊었나?"
"때가 되면 보내주는 것이 도리라는 게야. 물론 이미 잊었고."
언젠가는 내도 잊을 기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선문답은 결국 미카의 눈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는 자라야 한다고, 폐쇄적인 이곳을 벗어나서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지금껏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슈였고, 조금 더 솔직하지 못한 쪽도 슈였다. 그날 오후, 티타임에서 미카는 각설탕 대신 붉은색 사탕을 먹었다. 쨍한 붉은색 유리구슬도 몇 개 가지고 내려와서는, 식탁에 깔아놓은 유리에 금이 가지 않을 정도로만 서로 부딪히며 손장난을 쳤다. 슈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독 흐리게 우러난 홍차를 마시며, 미카가 하는 모양새를 말없이 지켜봤을 뿐.
나를 놓지 말아줘. 나를 떠나지 말아다오. 두 가지의 색이 좀처럼 섞이지 않고 어쩌다 기름이 담긴 접시에 흘러들어간 물방울처럼 수면을 맴돌았다. 하나는 지극히 투명한 마음이었고 하나는 지극히 추악한 그것이었다. 결국 본질은 같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슈는 날마다 강박적으로 미카를 위한 새 옷을 만들었다. 달력이 넘어가고, 계절이 바뀌도록. 그러는 새 정원의 꽃들은 철이 지나 밤이 되어도 더는 피어나지 않았다. 해를 넘겨야 다시 선명하게 살아날 모양이었다. 어느새 밤공기도 제법 차가워져서, 미카는 창가에서 책을 읽는 건 슬슬 그만두기로 했다. 그 대신 슈의 방을 제 방처럼 드나들었다. 가끔 의도치 않게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적도 있었으나 슈는 별다른 말 없이 이불을 덮어주고 잠든 미카의 곁을 지켰다. 그런 아침이면 미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흡족한 얼굴로 슈에게 안겨오곤 했다. 이별의 때를 위해 만들어둔 옷이 그새 벽면 하나를 채울 정도가 되었으나 어느 한 벌도 똑바로 제 이름을 찾아간 옷은 없었다. 이건 연회에 갈 때 입고, 이건 원예를 할 때 입고, 이건 자수를 놓을 때, 이건 평상시에 집에서… 스승님, 이 집을 떠날 때는 뭘 입으면 되나? 그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카게히라. 답을 돌려줄 때면 미카는 잠이 들고 눈을 뜨는 시간조차 자로 잰 듯 정확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정작 그런 것을 준비해두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기쁜 눈치였다. 그 무렵 슈는 미카가 의상실에 출입하는 걸 금지했다. 대신 밤이면 꼭 함께 외출을 했고 잠들 때도 잊지 않고 곁에 있어주었다. 가끔은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랐던지라 한 해를 한 달밖에 남겨두지 않았을 때에는 치수를 완전히 새로 재야만 했다. 착실히 성장하고 있구나, 저도 모르게 퍽 뿌듯한 얼굴로 건넨 한 마디에 미카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굴 기세였다. 슈는 다급하게 그 눈가와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떠나지 말라고, 너를 놓지 않겠다고, 혹은 가지 않겠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누구였던가.
날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슈는 미카에게 포인세티아 화분을 선물했다. 앞날을 향한 축복의 의미였다. 그 앞날에 몇 사람이 있을지, 제가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내년에도, 이래 함께하자."
"…."
"집도 꾸미고, 화분도 늘어놓고… 일 년에 딱 한 번이지만, 불도 밝히고."
전나무에 색색으로 빛나는 전구를 달면서 미카가 말했다. 슈는 대답 대신 조용히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정작 그 뒤에 오는 생일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성탄절인 그날은 미카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고, 그건 이 집에서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임을 의미했다. 일 년에 단 하루, 눈이 부시도록 켜둔 창가의 전등을 바라보며 미카는 느리게 핫초콜릿을 마셨다. 눈치채지 못하는 새 옆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카게히라."
"응?"
"내가 너에게 성탄 선물로 무엇을 주었지?"
"스승님이 내한테… 아, 아침에 새 옷이랑 브로치 줬잖나. 그러고 보니까 내도 스승님 선물 줘야 되는데."
"내 선물은 이것으로 다오."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는 미카의 손에 빠르게 무엇인가를 쥐어준 슈가 눈을 바라보며 선명하게 웃었다. 검은색 케이스에 든 것은 은으로 된 단도였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숙명적으로 나를 죽임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다. 몸과 생각은 다 자랐다 할지언정 이때껏 기대어온 둥지를 없애는 것으로 독립하는 셈이지. 이제 네 차례다. 눈이 마주치자 한없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는 보라색 눈동자는, 차라리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수십 번의 헛된 죽음 끝에 비로소 진정 의미있는 끝을 맞게 되었다. 마지막이 될 순간을 떠올리니 어째서인지 홀가분한 웃음까지 짓게 되는 것이었다. 그 언젠가처럼 입술을 꾹 다문 채 어떠한 답도 돌려주지 않는 미카에게 슈는 천천히 입을 맞췄다. 수십 혹은 수백 년이 흐르도록 변하지 않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그날 밤 미카는 슈의 방으로 찾아왔다. 놀랍게도 빈 손이었다. 퍽 대담하게 옆자리를 파고드는 그를 부러 말리지 않았다. 금기어라도 되는 양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사랑을 논하도록, 그저 그가 말하는 대로, 저를 데려가려는 대로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껏 흔들림 없는 한 쌍의 자수정은 놀라울 만큼 평정을 지키고 있었다. 무너지지도 스러지지도 않은 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있는 한껏 흐트러진 건 오히려 미카의 쪽이었다. 어설프게 매혹하려 들었다가 도리어 빠져나갈 길 없이 울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허나 밖으로 나가는 문을 닫은 것은 슈가 아닌 그 자신이다. 몸소 빠져나가기를 거부한 건 미카였다. 애초에 이곳에 온 뒤로 무엇 하나 자의가 아닌 행동이 없었기에. 새벽이 밝아올 무렵 미카는 길었던 유년에 안녕을 고했다. 슈가 바랐던 것과 달리 뜨는 해를 바라본 것은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누구도 혼자 남겨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스승님, 내 갈까?"
슈가 내어온 찻잔 안을 새삼 신기한 듯 들여다보던 미카가 문득 물었다. 긍정하지 못할 것을 알고 묻는 것이다. 대답 대신 두 어깨에 팔이 둘러졌다. 미카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몸을 옆으로 기울여 시야를 같게 한 뒤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럴 것 없다."
"…."
"대신 이곳에서… 영원히 나를 살게 해다오."
덧없는 존재에게 덧없게도 영원을 바랐다. 끊어지지 않을 목숨이라면,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끊을 수 없는 생이었다면. 그렇다면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둘만으로, 언제까지나. 슈의 얼굴을 살짝씩 스치며 헤매던 미카의 손이 조심히 하얀 뺨을 감쌌다. 영원에 대한 대답인지, 또 다른 생을 달라는 것에 대한 대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긍정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주 느리게 입술을 겹쳤다. 이제는 멈출 필요도 그럴 수도 없는 시간이 두 사람을 둘러싼 채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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