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슈미카_전력

16차 전력 주제 : 접촉

 

 오랜만이군.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건 없지만, 오늘만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해도 괜찮을까. 딱 오늘까지만이야. 마침 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외로워보인다, 라…. 그 말도 제법 오랜만에 듣는걸. 당신은 언젠가 내게 그랬었지.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또 방 안에 틀어박혀 나갈 줄을 몰랐을 때도. 그때마다 당신이 어떻게 답해주었더라.
 혼자가 아니라고. 아아, 그래. 그 말이었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고, 더는 그때처럼 자그맣지 않은 내 손을 잡아준 건 다름아닌 그 아이였지.

 기억 나? 망가진 내게 그 아이가 해줬던 말. 메인테넌스 좀 해달라고… 지금 생각해도 놀랍지, 망가진 인형사에게서 대체 뭘 바랐던 걸까. 그 아이는 그 시간을 제법 소중히 여기는 눈치였지만 나 역시도 그걸 위해 살아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추악한 나는 그 어설픈 아이를 보살피고, 관절이며 뼈마디를 점검하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곳은 없는지 찬찬히 따져보며 행여 불편한 데는 없느냐고 묻는 그 시간을 유일한 구원으로 여겼었거든. 그렇게 바닥도 모르고 치달았던 주제에, 그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너무도 아름답고 고고하지 않았겠어. 그 노랗고 푸른, 그래, 짝도 맞지 않는 두 눈이 담고 있는 건 단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제왕이었고, 이 세계의 신이었고… 하나뿐인 구원자였어. 나는 결국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지.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뻗은 손에 우연찮게 그 아이의 손이 닿았을 때부터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 '처음'의 일일까. 그 아이의 상태를 정비해주고 돌아온 밤이면 나는 울었어. 두 손이며 온몸에 남아있는 온기가, 피워두었던 라벤더향 향초의 향이 선명하게 남아서, 꼭 실처럼 내 목을 죄어오는 것만 같아서. 끝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가 환영처럼 눈앞을 맴돌아서.

 상처는 훈장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믿었는데, 대체 나는 어째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 게 버거워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나를 대신해 당신이 나서주었지. 당신이 건네는 말들은, 목소리는 조금 기이할지언정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너무도 달콤해서, 단 걸 좋아하는 그 아이가 좋아하겠더군. 차라리 그대로 그 달콤함에 익숙해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토록 상냥한 당신을 두고도 그 아이는 나를 찾았어. 스승님이, 스승님은, 스승님도…. 그 세 글자가 지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없이 소중해서, 나는 비겁하게도 당신을 내세워 그 아이의 발목을 붙잡고, 애먼 날개를 꺾고. 그렇게 눈부신 아이는 내 그림자 따위나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었을 터인데.


 하지만 그 아이가 그토록 열렬히 나를 빛내준 덕택이었을까, 다시 날아오르고 싶어졌어. 무너져버린 성터에서 나는 내가 죽인 누군가의 청춘을 발견했고,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 모든 게 금이 간 채로 불완전하게 쌓아올려간 모형정원에 지나지 않았더라면.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어설프게나마 내가 보듬고 나를 지켜온 그 아이와 함께, 두 번 다시는 누구도 상처 입지 않을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그걸 그 아이를 향한 속죄로 삼기로 했어. 숨이 다하는 날까지 결코 완전히는 끊어내지 못하겠지만, 아주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갈 수 있다면. 저를 위한 세계에서 그 아이가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나자고.
 말한 것은 나였지만 그 말의 음절을 조합한 건 그 아이였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 아이와 꿈을 꾸고 싶었어. 툭하면 안겨오는 체온이 싫지 않았고, 살갑게 말을 붙이며 웃어보이는 얼굴이 사랑스러웠어. 완벽하지 않다 할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자력으로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인형보다는,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몸이 자라는 사람이 훨씬 소중할 수 있음을 알았어. 어깨에 지워진 책임이 감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어.

 하지만 내 소중한 사람,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짓밟은 그 아이의 시간이 너무도 막중해서, 나는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인형사를 묶고 있던 실을 끊어준 게 결국은 결함투성이 인형이었더라는, 그저 그런 옛날 이야기다운 끝이지. 하지만 그런 끝이 나에게는 어찌나 아름답던지. 맹세코 당신이 읽어준 그 어떤 동화보다도 눈이 시렸고 코끝이 매웠어. 차라리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한없이 달콤하고 환상적인 꿈이었지만, 그 뒤에 올 현실에서도 그 아이가 함께한다면.

 그럼 눈을 떠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일 년에 단 한 번, 별들이 만난다는 날을 앞두고 그 아이에게 말했어. 나는 너와 한갓 꿈이나 꾸자는 게 아니라고. 현실에서 살아가자고. 그래, 반은 진심이었어. 나의 현실에도 분명 그 아이가 있어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에서 비롯한 말이었지만, 그 아이는 꿈보다도 더 꿈 같은 모습으로 날아올랐고.

 나의 생일을 하루 앞둔 날 그 아이는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빛날 줄 알게 되었지. 너무도 과분한 생일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 이제 함께할 수 없다 해도, 설령 마음 깊은 곳에서는 비명을 지를지언정 그걸로 족하다고. 이번에는 나를 죽일 작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욕심을 삭일 수도 있다고 믿었는데, 줄곧 나의 이상이었던 천계로 가는 길목에서 그 아이가 결국 나를 택한 것은 운명이었을까. 웃었지만 조금은 눈물이 났지. 무대의 뒤편에서 나는 그 아이를 끌어안은 채 놓을 줄을 몰랐고, 그 아이는 나에게 사탕을 건넸던가. 떠났던 이들이 살아돌아온다는 날, 나는 희망을 찾았어. 어쩌면 원래부터 내 곁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신화 속 누군가가 실수로 열어버린 상자의 밑바닥에 남아있던 게 희망이었듯이, 나에게는 그 아이가 남아서 계속 살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을. 끌어안고 수도 없이 속삭이던 말이 고마움의 말이었는지 사죄의 말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내가 한없이 행복했었다는 것만큼은 뚜렷이 기억이 나. 이대로 숨이 멎어도 행복하겠다고. 아니, 이대로 조금만 더 살아 숨쉬고 싶다고. 그 아이의 세상에서, 그 아이와 함께.

 웃고 있는 그 아이를 바라볼 때면 묘하게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하고 그럼에도 묘하게 함께 미소짓고 싶어지는, 결코 싫지 않은 따스함을 나는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 처음으로 알게 된 체온의 소중함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이라고 정의내려버렸으니까.


 그래서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느냐고 물었지.

 거절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하면 당신은 웃을까? 정작 그 체온에서 멀어져 살아갈 수 없는 건 다름아닌 내가 되어버렸어. 갚아나가야 하는 것들이, 주어야만 하는 감정이 산더미 같은 것도. 그 책임이 막중해서 도리어 웃고 싶어졌다면, 이제는 어디에서 꺾어온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힘으로 피워내고 싶은 꽃이 생겼다면. 내가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동경하고 아끼게 되었다면. 그 아이를 향한 이런 나의 마음조차 전에 없이 소중하고 특별하다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럼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제 외롭지 않을 예정이야. 어쩌면 그저 바람에 지나지 않겠지만, 조금은 터무니없는 바람조차 이루어줄 사람이 생겨서 말이지. 이제는 내가 놓지 않을, 놓지 못할 사람이. 아직은 자신이 없지만,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른 뒤에 - 나와 그 아이가 온전히 서로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축복해달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햇살이 눈부신 날, 내가 그 아이에게 가고 그 아이가 나에게 오는 그 길이 아름답도록.

 눈높이가 높아지는 게 그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내가 이렇게나 자랐어. 어쩌면 이것으로 어린 날의 치기와도 이별인지도 모르겠군. 그 언젠가, 어째서 아이들은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느냐고 엎드려 울었다는 이야기 속 소년보다도 이제는 퍽 많이 자라버렸지. 이제 뒤를 돌아보거나 멈춰서는 일은 없을 거야. 진공상태인 유리장이 아닌 현실에서, 인형이 아닌 사람들과, 그 아이와…. 그래, 꼭 언젠가의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작별인사처럼.

 그렇게 살아가려 해.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날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웃어주겠어? 당신이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을게.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태양과도 같은 따스함을 잃지 않을게. 이제는 그 아이에게, 당신이 건넸던 수많은 말보다도 훨씬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한없이 눈부신 세상을 선물할게. 어설프기 짝이 없겠지만, 내가 이렇게나 자라서 당신을 따라하려고 해. 아직은 모든 것이 설지만 언젠가 그 그늘조차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 또 언젠가는 그 아이의 눈높이도 훌쩍 자라서, 내 앞에서 마음껏 울고 속에 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려나. 그때는 훨씬 하얀 말들을 전해줄 수 있는 나였으면 좋겠어. 좀 더 모서리가 둥글고, 좀 더 무해한, 적어도 눈물이라도 닦아줄 수 있는, 그런 말들. 지켜봐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적어도 올라가는 막을 축복해줬으면 해. 그렇지,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표정까지 속속들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상냥했던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게. 나만이 줄 수 있는 달콤한 것들로 이제는 그 아이를 끌어안을게.

 자, 이제 막이 올라갔어. 공연의 시작이야. 무대 위로 올라와도 좋아.


  내가 동경했던 그대, 괜찮다면 내 유년의 마지막 춤을 함께해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