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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재생(再生) : 시간이 흐르는 계절

#슈미카_전력

26차 전력 주제 : 결혼

 

 Re:birthday

 내,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데이. 한창 진행 중인 무대의 불빛을 등지고 그렇게 말하던 너는 태양의 현신과도 같이 반짝였었다. 태양이 다 타들어가고, 잿더미에서 또 다른 볕이 타오를 때까지 그 곁을 지키는 신화 속의 까마귀가 아니라 네 자신이 태양이었어야 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속죄와 참회의, 하지만 결코 후회의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했다.

 너는 늘 그러했듯 화려하게 빛나는 자리는 정중히 사양했다. 낮을 밝히고 지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태양이 아닌 야경을 수놓는 별이 되겠노라고, 태양을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눈을 돌리면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너라면 필시 내가 지나쳐온 곳에도 빛을 밝혀줄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 네가 어둠 속에 살던 나에게 손을 뻗어주었듯이.


 스승님, 내 앞으로 안대 써도 되나? 제 눈을 싫어하고, 정확히는 눈을 바라보는 주위의 날카로운 시선에 베이는 걸 두려워하던 너는 어느날 문득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들어 마주한 너의 두 눈은, 여전히 균형이 맞지 않았고 여전히 어딘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긍정의 답을 바라는 눈이 아니었다는 말만큼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부정 당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보루, 어린 시절 백사장에 놀러 갔을 때 손으로 조금씩 모래를 퍼오다 마지막으로 남은 얕디 얕은 산과 삐뚜름하게 꽂힌 조개껍질처럼. 내가 긍정했더라면 너는 그 자리에서 물에 닿은 설탕 인형처럼 하릴 없이 녹아갔을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도 더 너를 아껴주던 인형을 뒤로 한 채.

 허튼 짓 말거라.

 더는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자수를 놓고 있던 천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네가 웃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것으로 나는 온전히 네가 살아가는 세상의 신이 된 기분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방의 휴지통에 버려진 안대를 발견했을 때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네가 그토록 스스로를 감추고자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하며 어떻게든 네 자신을 - 어쩌면 다른 누군가로 꾸미고자 하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탓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나는 네가 언제 우는지 알지 못했다.
 계산된 순간에 나를 보면서 웃어주던 네가, 그럼에도 단 한 순간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네가 단 한 가지, 우는 기능만은 탑재되지 않은 인형처럼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웃는 걸 보면서 심장이 먼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진심으로 네 손에 삶을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내가 쥐여준 칼조차 노래의 선율로 바꾸었지. 내 손을 잡아, 더는 두렵지 않은 조명이 내리비추는 스테이지로. 나를 깨워준 것은 언제라도 너였기에, 죄라고 할지언정 행복이라 이름 붙이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울고 싶다면 울어도 좋아, 카게히라. 밤의 장막 위로 더없이 조심히 내려앉은 말은 허락도 아니었으며 선포는 더더욱 아니었다. 숱하게 불러왔던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네가 여태껏 참아온 눈물의 무게, 태어나 이제껏 울지 못하고 지었던 웃음과 맞바꾸어 몸을 좀먹던 감정의 무게였겠지. 답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고 짐짓 단호히 고개를 내젓는 네게 고집스레 입을 맞추고. 갈 곳을 잃은 오른손에 손을 겹치며 몇 번씩 답을 종용했다. 날은 어두웠고 우리는 누구의 눈이라 해도 피할 수 있었으니. 피부가 피부를 스치고 짧게 뺨이 맞닿고, 머리칼이 흔들리며 가슴팍을 간질인 횟수까지 낱낱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네가 되어보이겠다 맹세했던 별이 눈앞에서 흩날렸고 시야가 몇 번이나 하얗게 소멸했다가 돌아온 뒤에 - 비로소 너는 울었다. 밤하늘을 닮은 색의 머리칼이 눈 근처에서 살랑였고 나는 네 머리칼 끝에 입맞추며 온 힘을 다해 슬픔을 끌어안았다. 실은 그 눈에 자화상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담고 싶었을 터인데, 그리고 그게 나였을지도 모르는 것을. 눈가에 입술을 내리는 나를 끌어안은 채 아주 오래도록 울었다. 실은 있제, 그동안 우는 법을 몰라서….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대신 삼키면서도 단 맛이 느껴지는 게 혀 끝에 와닿는 투명함인지 너를 이루고 있었던 설탕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 눈물로 세례라도 받은 것만 같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되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끌어안은 귓가에 속삭이며 수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너는 다만 그 말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해. 그제야 너는, 행여 내가 미처 잡아채지 못하고 지나칠까봐 두려운 눈치로 몇 번씩 고개를 끄덕이며 내 품에 얼굴을 묻어왔다. …응, 사랑한데이, 스승님. 난생 처음 우는 것처럼 울고 난 너는 더 이상 당장에라도 사라질 듯 위태롭지 않았다. 사랑은 이제 손 끝이 닿는 것으로는 녹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푸른색의 장미 꽃다발을 건네받는 꿈을 꾸었다. 너는 제 눈을 빼닮은 꽃다발을 내게 건네며 새하얗게 웃었고, 나는 그대로 기적의 가면을 쓴 불가능에 홀린다 해도 좋다고 생각해버렸을까. 너의 등에서 기계 장치로 된 날개가 까딱였다. 있지도 않은 하얀 깃털이 흩날리고, 너는 사뿐히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아 춤을 추었다. 종래에는 나조차 그만큼 작아져서 미니어처 인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 우리, 결혼할까. 왼손 약지에 자리잡은 가느다란 링을 만지작대며 네가 웃었다. 맞닿은 이마가 키득대는 네 숨결에 따라 흔들렸고, 내 품에서 많이 웃고 조금 우는 동안에도 설탕으로 이루어진 나의 카게히라는 조금도 녹지 않았다. 꿈결처럼 단 주제에 나를 보며 꿈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그 눈은 여전히 달까, 단 한 번도 침범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맛보는 건 더 이상 죄가 되지 않기를. 글쎄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꾸나. 조심히 맞잡는 손 틈새로 맥박이 스몄다.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게끔. 어느 틈엔가 뛰는 속도마저 닮아버린 심장을 기적이라 부르며 월하의 붉은 실이 가로질렀을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세상이 끝나고 신화가 다한다 해도 결코 닳지 않을. 그리하여 수천 번의 약속을 넘어 밝아올 아침도 함께 맞자. 해가 저문 뒤에 찾아오는 어둠을 밤이라 부르지 말고, 더는 웅크린 채 울지 말고.



 우리는 아직 눈앞에 있는 문을 열지 않았다. 더는 꿈 속의 일이 아니게 된 푸른 장미가 아직도 불가능을 뜻하는 꽃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만났는걸, 이루지 못할 꿈 같은 건 없어. 다른 우주의 일인 것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면 지금 여기에서 기적이라 이름 붙이자. 수없이 교차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눠온 노랗고 푸른 한 쌍의 눈동자가 위로하듯 휘어졌다. 그리고 아마도 새롭게 펼쳐질 무대의 주인공이 될. 그 눈빛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도 같고 괜찮다고 하는 것도 같아서, 밤을 새워 만든 꽃다발을 소중히 쥔 손을 살짝 감쌌다. 떨리나? 내가 물으면, 너는 몇 번의 큰 무대에서 보란 듯 빛나던 때의 얼굴로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끝내 기쁨을 감추지 못해 네 이마에 입술을 내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껏 우리는 실존하는 것들을 현실이라 불러왔기에, 여기 놓인 길에 그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꿈 속에서나 있을 법한 불가사의한 일도, 어떤 말이 되지 않는 공상도 머릿속의 모형 정원이 아닌 이곳에 펼쳐보인 너의 손을 잡아 언젠가의 프롬 파티를 떠올리며 손등에 느리게 입을 맞춘다. 눈을 떠도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발을 딛고 살아갈 꿈의 연장선에 푸른 장미꽃잎을 내려놓기로, 걷는 길목에 놓인 단 한 장의 꽃잎도 시들지 않기를 바라며.

 흐르기 시작한 초침은 더 이상 멈춰서지 않았다. 가둬둘 시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어떠한 후회도 없었다.


 살아가자. 귓가에 울리는 심장 박동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윤무곡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