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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마리오네트의 환상극장

#슈미카_전력

22차 전력 주제 : 예술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조명이 꺼지고 막이 내려오면 카게히라 미카는 공연에 사용했던 손인형을 챙겨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말로는 관심이 식었다고 하나 짐을 챙겨 떠나지도, 저를 외면하지도 않는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계단참에 앉아있었다. 체격을 제외하면 아마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깡마른 뒷모습에 잠깐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 잔뜩 붐비던 관객석도 아닌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차가운 계단에서 기다리다니. 그러나 그의 성에 차지 않는 것은 타인도 저도 아닌 그 자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카는 부러 밝은 체 목소리를 높였다.


 "스승님, 내 왔다."


 보라색 눈동자가 이쪽을 돌아본다. 하루 치의 피로에 잠겨있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었다. 오늘은 사람들이 많았데이, 진행도 매끄러웠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늘 일방적인 보고가 주를 이뤘다. Theater of Fantasy. 두 사람의 등 뒤로 낡은 간판이 힘겹게 깜박이며 불을 밝혔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어스름한 시간이었다.

 환상의 극장, 한때는 꿈을 무대에 올리는 곳으로도 유명했던 이곳은 이제 그저 꿈의 매장지가 되었다.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인형극이 뒤안길로 물러난 지도 벌써 제법 오래되었다. 영화에 투자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맹목적으로 실 끝에 매단 희망은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한때 인형극의 연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츠키 슈 - 미카는 그를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 가 하루 아침에 칩거를 택한 데에는 이러한 맥락의 몫이 컸다. 실에 맨 희망은 녹슬었고, 탓에 구체관절 인형을 만들겠다던 최초의 꿈은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동료들은 하나둘 길을 떠났다. 미카는 이곳에 남기를 택한 몇 안되는 연사 중 하나였다.

 멋 모르고 근방을 헤매던 아이를 데려다 실을 쥐여주고 인형극을 가르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고, 때때로 슈는 생각했다. 무대에서 실수가 잦던 것도 잠시, 금세 자리를 잡은 미카는 제 방에 산처럼 쌓여있는 봉제인형의 모습을 본뜬 줄인형을 제일 좋아했다. 암막커튼 뒤에서 실을 쥐고 있는 그 아이는 언제라도 빛났고 슈는 그런 순간들을 눈에 담는 게 퍽 행복했다. 떠나지 않기로 한 것도 미카를 위해서였다. 조금 더 제 꿈을 펼치게 해도 좋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아직 미카는 희망의 소진을 겪지 않았으니까. 텅 비어버려 누구도 화답하지 않는 관객석과 마주하던 날을 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미카 역시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이 또한 노파심일 수 있었기에 불이 켜진 무대 위에서 눈을 반짝이며 인형극을 펼치는 그를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이를 바라보는 눈에 어딘지 서글픈 빛이 어렸다.


 그래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 모습으로 인해 꿈을 꾼다면.


 높이 뜬 별을 바라보다 지쳐 결국에는 산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타협이라면 타협의 결과였다. 예술은 이다지도 별 볼 일 없고 협소한 것이라고, 언젠가 그 누구보다도 의기양양하게 제가 진두지휘하던 무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비록 사람은 암막커튼 뒤로 숨고 앞에서 보이느니 실이 조종하는 인형이 전부라 할지언정, 그 작은 세계의 신이 되는 건 누가 뭐라 해도 분명 사랑스러운 경험이었던 것을. 지금 제게 남은 것은 영사기 속에서 바쁘게 짜맞춰지는 필름처럼 조각난 기억들과 암막 커튼보다도 어두운 현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카게히라. 정확히는, 그 아이가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았다. 아직도 어린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알고 거만하지 않되 당당하게 인형극을 계속해나가는 미카만이, 슈에게는 유일한 광원이었다.

 볼품없이 빛이 바래가는 낭만 속에서 홀로 반짝이는 그 아이야말로 겉으로는 늘 태평한 척했어도 진정 예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예술이란 필시 제가 끌어안은 낡은 이름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값지고 반짝이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둘이 쓰는 집에서는 창문으로 극장이 내려다보였다. 불을 밝힌 간판은 날벌레만 꼬인다 해도 꿋꿋이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명도 다해가는 전구가. 미카는 인형극에 쓰이는 줄인형을 가지런히 책상에 정리하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은 기제?"
 "…어디로 말이냐."
 "스승님은 인형을 만들구 싶어했으니까…. 나즈나 형도 류 군 씨도, 인형을 만든다 인형 옷을 만든다면서 다 떠나삣구."
 "…."
 "스승님도 가도 된데이. 그게 스승님의 예술이잖나."
 "내 하잘것없는 예술은 이미 죽었다, 카게히라."


 진창 망가지고 꿈이 깨져 나뒹굴어본 자의 눈빛이었다. 그런 이가 아니라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끝났다며, 야유를 온몸으로 짊어진 채 길을 떠나던 동료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더 높은 이상이 있었음에도 한 번 꺾여버린 날개는 다시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주저앉은 이의 눈에서, 좌절하고 절망한 청춘의 앞에서 미카는 말없이 슈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 순간 제가 이끌어온 사람이나마 삶의 지표로 삼은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가. 그가 기억하는 제 모습은 필시 암막 뒤편에서 호기롭게 인형의 줄을 당기는 미소였을 것을. 그런 그에게 나의 꿈은 네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기를 또 얼마나 잘한 일이라 여겼었나.


 "그럼 다시 살려내면 되지 않긋나."
 "…카게히라."
 "인형극은 그래 하는 기다. 실을 당기구, 놓구…. 느슨하게, 또 세게,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다시 숨을 불어넣으면서. 봐라, 여기 있는 줄인형들두 내가 손을 안 대면 아무것도 못한데이. 그래도 내가 실을 잡으면, 다시 움직이제. 얘네도 살아나는 기라."
 "…."
 "스승님도 똑같다고 생각한데이. 실을 놓은 건, 스승님이잖나."


 노란색과 푸른색의, 인형이라 해도 드물었을 눈동자가 애틋하게 휘어졌다. 결국은 다시 인형극을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터였다. 슈는 그제야 수 년 전에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눈높이가 조금 밑돌았던 소년을 기억해냈는지도 모른다. 인형의 관절 하나하나에 연결된 실을 차분히 당기는 손놀림을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손뼉을 쳤던. 그리하여 결국은 저의 꿈이 되어버린 이를.


 꿈의 이름을 단 간판은 낮게 뜬 별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슈는 다시 줄인형을 들었다. 이전처럼 객석이 다 차지는 않았으나 만족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미카는 때때로 슈가 그러했듯 그의 무대가 끝날 때까지 백스테이지에서 기다리기도 했으나 대체로 객석 맨 앞 줄의 표를 사곤 했다. 더는 반짝일 수 없다면 몸소 닦아 빛내면 되는 일이었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오직 그 자신만이 선보일 수 있는 극(劇)을. 막이 내리고 난 뒤 무대를 정리하던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의 예술을 찾았느냐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줄의 마모된 부분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떠나고 싶느냐고. 미카의 손에 들린 줄인형을 건네받으며 그가 물었다. 나의 예술이 바로 이곳에 있지 않느냐고. 대답에 가까운 물음에 미카는 그제야 웃었다. 슈는 아주 오랫동안 미카를 끌어안은 채 놓을 줄을 몰랐다.


 인형극을 선망하던 아이는 줄을 잡는 걸 업으로 삼기로 했다. 뒤이어 이룰 인형사라는 오랜 꿈도 같은 연장선에 있었다. 긴 시간에 걸쳐 마침내 완성한 작품을 공들여 감상할 틈도 없이, 밖에서는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새로운 극을 선보인 모양이었다. 길을 가던 미카를 붙들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인형극을 펼치던 게 지금의 시작인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닌 듯했지만.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한 터라 피곤한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그 자신도 오랫동안 기다려온 인형은 녹색 안구를 빛내며 책상 위에 앉아있었다. 아직 어떠한 이름도 받지 못한 채로 - 어쩌면 그저 대명사로 칭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 다만 끝없는 가능성을 안은 채.


 마당에 나가니 이미 아이들은 제각각 흩어진 뒤였다. 뿌듯한 얼굴로 줄인형을 정리하는 미카가 보였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좇아 결국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낸 이야기는 누구에게든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어린 관객들이라 할지라도. 가만히 다가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돌아본다. 비록 이전과 같은 무대는 없으나 더욱 진실된 관객이 생겼으니 잘된 걸까. 어느 하나 들어가자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미카는 먼저 슈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간판에 불을 밝힐 시간이다.


 어떤 무대보다도 넓은 세상에서의 극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