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키 슈에게 있어 만물이 고요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카게히라가 숨소리마저 정갈하게 잠들 때까지 그 곁을 지킨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 아이가 잠들면 저의 세계도 푸르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기에. 익숙한 잡화점의 셔터가 내려오는 것보다도 조용하고 정적인, 잠깐의 뒤척임이 지나고 나면 -
비로소 인형의 시간이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고요한 방 안을 울리는 심장 박동을 듣는 것은 거의 일상이 되었다. 제가 사랑했던 인형은 어째서인지 이제 미카의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놓여있다. 인형은 인형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할 거라나.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분명 그걸 알고 있을 것임에도, 어째서.
놀라울 만큼 규칙적인 호흡을 듣고 있노라면 눈앞의 이 아이가 그토록 활기차게 저의 낮을 누비고 밤이라 해도 여지없이 역동적으로 제게 안겨오던 이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잠깐이나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슈는 잠깐 숨을 흡, 들이마시고는 손을 뻗어 미카의 뺨을 깨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건드렸다. 짧은 동작이었으나 그것만으로 그가 인간이라는 건 손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인형과는 분명 다르다. 그걸 자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한 듯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은 내한테서 누구를 보고 있는 기가.
가끔 그런 말을 들었다. 미카는 문득문득 참을 수 없이 불안해했다. 메인테넌스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함께 하교하다가도, 하다못해 제게 몸을 맡길 때까지도. 그런 물음을 받으면 허를 찔린 양 잠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이내 조금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를 조심히 품에 안으며 돌려주는 답은 매번 같았다.
너는 너인 거다, 카게히라.
어설프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게 사실이었다. 맹세코 슈는 단 한 번도 미카에게 다른 누군가를 투영해본 일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에게서 선물받은 인형이 목소리를 갖기 시작했을 때도, 걸작이 떠나갔을 때도, 잠깐이지만 떠났던 이가 돌아왔을 때도.
이츠키 슈에게 카게히라 미카는 매 순간 카게히라 그 자체였다. 너무도 특별해서, 혹은 너무도 특이해서 타인 혹은 다른 존재로의 투사조차 불가능한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미카였다. 미카를 통해 다른 이를 본다든가 하는 일은 여태까지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행여 그 반대는 있을지언정.
이츠키, 변했네.
예를 들면 얼마 전 우연히 마주쳤던 니토의 한 마디라든가. 더는 예전처럼 열광하지 않는 모습에 순전히 기뻤던 것뿐인지, 혹은 저를 이렇게까지 변하게 만든 사람이 미카였다는 게 신기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니토는 한참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다행이야, 행복해보여서. 이제 미카 칭은, 행복하겠다. 어쩌면 진심이었으리라. 그제야 제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새삼 깨달아버려서, 요즘 출연 중인 토크쇼를 잘 보고 있다는 정도로만 대화를 마무리지어버렸다. 다음에는 셋이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 후련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서는 상처도 미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게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온갖 감정이 뒤섞였던 옛 동료와의 일도 차츰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게 되었고, 인형은 인형으로 돌아갔으며, 사람 역시 사람으로 돌아갔다. 그 길다면 긴 시간동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카게히라, 그 아이뿐일 거라고.
처음부터 인형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면서,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 그 긴 시간을 홀로 연기해왔으면서. 그럼에도 그 또한 사람이라 유일하게 무방비해지는 때가 있다면 그건 역시 잠들어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온전히 제 손에 들어온 것도 같지만 또 한편으로 한없이 멀어지는 것 같아서, 슈는 그 시간이 못 견디게 싫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온전히 인형이 되지도 못했던 이가 이제나마 짧게라도 인형 행세를 하겠다는데, 그조차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모양새란. 밤이면 잠든 미카의 곁을 서성이다가 그의 숨이 닿는 곳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반드시 숨결이 미치는 곳에서, 오르내리는 심장박동이 들리는 곳에서. 체온이 남아있는 곳에서.
두려웠다.
그러니까 무엇이 그렇게 두렵냐고 묻는다면, 그가 정말로 인형이 되어버릴까봐 두려웠다고 말할 테다. 선명하게 뛰고 있는 심장이 실은 기계심장이었다든가 하는 결말이 두려웠던 것이라고.
영영 흐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앤틱인형의 시간이 한꺼번에 흐르기 시작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차츰 마모되기 시작한 겉면은 이 이상으로 공기에 노출시켰다가는 오래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최후비책으로 유리장 안에 보관해두기로 했을 때 미카는 제법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왜 그리도 갑작스레 마모가 시작되었을까. 행여 눈길이라도 받으면 더 망가질까 장식장에 들어간 뒤로는 한 번 마음놓고 바라보지도 못했다. 한없이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다.
이제 그 앞을 서성이고 수시로 먼지를 터는 것은 미카의 몫이었다. 다른 일에는 곧잘 겁을 먹더니만 깨트리거나 망가트릴 게 없어서인지 덥석덥석 걸어나가 유리케이스를 청소하고 이따금 열쇠도 공들여 닦기 일쑤였다.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다리는 적도 많았으나 요즘들어 차츰 그 뒤에 숨어있었던 사람의 정체조차 눈치채버린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호칭도 바뀌었다. 마드 누나에서, '인형 씨'로.
자랐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 다들 그렇게 자라는 거지 뭐. 그러는 이츠키도, 그… 마드모아젤이랬나. 아무튼 그 인형이랑 헤어지는 중이니까, 자란 거 아니야? 둘 다 제대로 성장하는 중이네, 다행이야. 언젠가의 니토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저도 카게히라도, 자랐다. 혹은 자라는 중이거나. 오래 전에 쇼케이스를 뛰쳐나간 지난날의 동료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알아? 언젠가는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둘지도. 여전히 좋아한다고 했던 로드샵의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는 다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 테다. 제가 생각하는 카게히라라면, 제가 사랑하는 카게히라라면.
저를 사랑하는 카게히라라면.
이따금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표류하다 보면 차라리 인형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 또한 얼마나 어리기 그지없는 사고방식이던가, 인형사가 끊어져버린 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쇼케이스의 문을 열다니. 아, 이건 새로운 무대의 플롯으로 쓸 만하겠군. 카게히라에게는 실을 끊는 역할을 주자. 아니, 그 전에 오를 무대는 있는 건가? 이렇게 머리가 아플 바에는 차라리. 사람이 되어서 사람인 나를 향해 질리지도 않고 웃어주는 저 아이를 보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내가 저 아이의 애착인형이라도 되어버릴까. 같은 인형의 세계에서라면 저것의 사고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한없이 떠돌고, 표류하고. 잃어버린 것들은 잊고, 남아있던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으면서.
카게히라, 나를 사랑하나?
왜 그런 것을 묻냐는 듯 나를 바라보던 너의 그 균형이 맞지 않는 눈동자조차 나는 사랑했다. 설령 나를 사랑하는 너의 마음이 그저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망을 끌어안은 채 네게 입을 맞췄다. 그야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누군가의 체온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 잊혀버리니까.
다른 소중한 걸 얼마든지 내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
언젠가 네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답했다. 내 마음이 네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고 깊었을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엄선한 가장 무해한 것을 네 머리에 씌워주었다. 너는 잠깐 말이 없더니,
"…나즈나 형도 버릴 수 있나?"
"물론."
"마드 누나도?"
"당연한 걸 묻는구나."
"그럼 바느질 도구도?"
"그런 것들보다는 당연히 네가 우위라는 거다."
그런 대답이나마 받고 나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너는 나를 부르며 한 품에 안겨왔다.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장 투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네게 준 것만 같았다.
가장 투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러니까 말하자면 첫눈 같은 것.
아침에 창문을 열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눈을 유독 좋아해 시월 즈음부터 첫눈이 내리기를 노래까지 부르며 기다리던 카게히라의 방 문을 조심히 밀어젖혔다.
"카게히라, 아침이라는 게야."
"…."
"첫눈이 내렸다만, 어서 일어나지 않으면 다 녹아버릴 게다."
자주 함께 놀러나갔던 지난 겨울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껏 미동도 없는 모습에, 아주 조금 불안해져서. 여느 때처럼 가만히 손을 뻗어 톡 건드려본 뺨은 여전히 온기가 돌았고 혈색도 좋았다. 잠든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짧게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는 네게 불호령을 내릴 힘 같은 건 나에게 없었다.
어쩌면 계속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할 자격도, 애초에 나에게는 없었는지도.
"스승님, 인형 씨 새 옷은 안 만들어줘도 되려나…?"
"글쎄, 어차피 유리장 안에만 있을 테니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만. 네가 만들고 싶다면 그러거라."
"도안 몇 개 그려뒀는데, 조만간 보여주께. 인형 씨, 요즘 외로워보여서 새 옷이라도 입혀주믄 좀 생기가 돌 것 같데이."
저를 향한 원망이라고는 일체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더니 왜 하루 아침에 장식장에 넣어두고는 들여다보지도 않냐든가, 이제서야 인형에 신물이 났느냐고 비꼬는 일도 없었다. 인형에게서 생기 같은 것을 찾는 게 새삼 새로웠으나 저 아이라면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렸을 테다.
카게히라가 직접 만든 옷을 입혀주려고 조심히 옛 인형을 꺼내들었을 때는, 이전과 같은 마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 뒤였다.
미친 듯 서랍 속을 헤집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평정은 간데 없었고 얼굴에서 흐르는 투명한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약속에 늦을 것 같다며 니토에게 연락은 해놓았지만,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냐는 말에는 끝내 답해주지 못했다. 모처럼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간밤에도 분명 기분 좋게 잠들었건만, 대체 왜. 그 아이의 온기는 지금도 온몸에 남아있었다. 저 역시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니토의 목소리도 여느때와 같았다. 공연히 미카의 숨이 멈출 일은 없었다. 심지어 태엽 장난감의 공명과도 같은 심장박동은 여전한 채로. 요즘들어 행동도 조금씩 둔해지고 기상 시간도 알게 모르게 늦춰지고 있었는데, 조금 더 일찍 눈치챘어야 하는 것을. 주치의의 연락처를 찾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일순 뚝 멎었다.
그 순간 언제부터인가 제 인형의 시간이 멈춰있었음을 깨달았다. 마모도 더 이상의 손상도 더는 진행되지 않은 채로.
그녀가, 혹은 내가, 그 아이의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면.
슈 군은 숨어있는 거란다, 미카 쨩. 미카 쨩이 생각하는 만큼 슈 군은 단단하지 못하니까… - 응, 내도 안다. 근데 사람이면 단단할 수는 없지 않나? 봐라, 인형인 내도 이래 부드럽고 따뜻한데.
괜찮으니까 인제 나와라, 스승님.
그녀와 그 아이는 분명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그녀는 곧잘 이제는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 아이에게 해주었었고, 그 아이는 종종 눈을 빛내며 그걸 받아적기도 했을 터인데. 가팔라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불가항력에 떠밀리듯 유리장 앞으로 걸어나왔다. 제 기억에 열쇠는 미카가 보관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슈 군에게 걸림돌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몰라. 그때는 꼭 나를 부숴달라고 전해주겠니? 나를 부수고, 사라진 시간을 되찾으렴. 간단한 일이란다.
그 말을 들은 그 아이는 어떻게 했더라. 그 아이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던가. 또 나는, 그 선문답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있었던 나는? 창고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손도끼에는 먼지가 하얗게 앉아있었다. 닦지도 않은 채로 들고 나온 터라 걸어온 자리에 발자국 같은 흔적이 남았을 테지만 개의치 않고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한 선율과 함께 유리조각이 산산이 흩어졌다. 새하얗게 흩날리는 모양새가 꼭, 첫눈 같다. 어서 눈을 뜨고 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전부 녹아버리고 말 거라고. 나는 기필코 너와 함께 이 광경을 눈에 담고 싶다고. 조각나 부서지는 것은 어린 날의 추억이던가, 추악함이던가. 꿈에도 그렸던 이데아는 이제 이 땅에 없다. 정성들여 입혀준 옷도, 긴 시간이 흐르도록 신기하리만치 거의 상하지 않았던 구체관절도, 그 어느 때에도 그저 한결같았던 미소도, 모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조각나고 말았다. 이제 두 번 다시 인형사로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긴장이 풀리면서 손도끼가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이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의 시간이 미카 쨩을 조금 더 웃게 하는 데 쓰일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 그러니까 꼭, 이 이야기를 슈 군에게 전해줘. 이츠키 슈는 눈처럼 쌓인 유리조각 위로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마드모아젤, 나는 옳은 행동을 한 건가? 어떻게 하면 다시, 다시.
그 특별한 아이의 시간을 흐르게 할 수 있는 걸까.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부품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휘젓다가 용케 부서지지 않은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자주 들르던 앤틱샵에서 그 아이가 사온 것이었다. 제 손으로 만들어낸 잔해더미에서 온전한 것을 찾아내어 울고 있는 모양새란, 카게히라가 보았더라면 분명.
"스승님, 좋은 아… 여서 뭐하나?!"
멈췄던 초침이, 채칵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 사람의 시간이다. 지금은 단지 인형의 그것을 빼앗아 흘러가는 체할 뿐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존재하는 체온은 변하지 않는다.
등 뒤로 다가오는 익숙한 그림자도,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사랑하는 이의 존재도.
그제야 유리조각에 찔린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데 이제서야 겨우 웃음이 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표정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져서 다른 어떤 감정도 아닌 기쁨을 곧장 얼굴에 덧씌우게 되는 것은. 눈물 위로 호선을 그려나가는 이 감정은. 그 순간 뛰는 법을 깨달아버린 심장은.
카게히라 미카는 결코 알지 못할, 오랜 인형의 시간을 멈춘 어느 겨울 아침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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