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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세계는 이렇게 끝난다

#슈미카_전력

39차 전력 주제 : 만약

 



 그러니까 가끔씩은 이렇게 사람도 만나고, 응? 당신 보나마나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 '왕 님'이나 이즈미 쨩에게 물어봐도, 칩거 중이라는 답밖에 안 돌아오던걸. 다들 걱정하니까 연락이라도 한 번…. 잠깐 격앙되던 나루카미의 목소리가 차츰 사그라들었다. 가게 안을 울리던 파장이 사라지니, 눈앞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밖에는 남지 않았다. 탁, 탁, 뒤이어 타닥. 마치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가는 것과도 같은 소리.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다급하고 초조한, 시한 폭탄의 잔여 시간이라도 세는 듯한.

 제법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인데도, 내어온 찻잔에 새겨진 무늬는 꽤나 봐줄 만했다. 어색함을 풀기 위해 별 기대 없이 함께 주문한 조각 케이크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찻잔에 든 얼그레이는 이미 다 식어, 이제 향이나 맛이랄 것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뒤였지만. 나루카미는 접시의 반도 비우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은 그를 곁눈질하며 찻잔 손잡이를 몇 번씩이나 매만지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알았어, 그럼…. 오늘도 이쯤 할게."
 "…매번 굳이 걸음해줘서 고맙군, 나루카미."
 "혼자 놔둘 수가 없었을 뿐이야. …그 아이도 원치 않을 테고. 고마우면, 차 한 잔쯤은 선배가 사줘?"


 어차피 빈말이었다. 제 몫의 차는 이미 계산을 마친 뒤였으니까.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발랄한 포고에도 남자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원래 저렇게나 메마른 사람이었나, 싶다가도, 원래 이런 마음이 들게끔 하는 타입이었던가 싶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 두 어깨가 유난히 마르고 유난히 서늘해보였다. 늦가을 나무 같은 허전함이다. 나루카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자책하지 말고."
 "…그렇게 하지."
 "…잘 들어가, 이츠키 선배."
 "조심해서 가거라."


 순간 이츠키의 휴대폰이 건조한 진동음을 토해냈다. 무심코 액정 쪽으로 눈길이 간 것과 동시에, 그가 재빠르게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얼핏 예의 그 이름을 본 것도 같았으나,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불필요한 생각을 떨쳐냈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 경쾌한 종 소리가 그녀를 배웅했다. 종 소리 너머로, 이츠키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응대하는 목소리도 꽤 부드럽고, 곧바로 끊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럭저럭 가까운 상대인 듯하다. 그래도 통화할 사람은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혼자 내버려두기에는 마음이 쓰이지만, 이만 하면 장족의 발전이라며 나루카미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


 다녀왔다는 게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창이던 피아노 연주가 뚝 끊겼다. 뒤이어 익숙하다면 한없이 익숙한 그 얼굴이. 매번 다잡는 것이 무색하게끔 이츠키는 다시 무방비하게 웃어버리고 만다.


 "스승님, 와 전화 안 받나."
 "…아아, 그만 놓쳤다는 거다. 미안하군…. 밖은 바람이 거세서 말이지."
 "으응, 바람 마이 부나? 산책 나갈라캤는데."
 "산책이라면 언제든 할 수 있지 않겠나. 지금은 위험하니까, 우선 집 안에서 쉬도록 하지."
 "그라모 내 코코아 한 잔만 타도. 스승님이 타주는 거 마시구 싶어가 기다리고 있었데이."
 "그렇게 할까, 내 카게히라."


 사랑스러운 연인, 그 외의 다른 수식어는 붙이려 드는 족족 애정이라는 미궁에서 헤매이게끔 만드는 사람. 카게히라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내리고는 물을 올리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는 새 그 아이는 제 몸만한 소파에 깊숙이 파묻히듯 앉아,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료한 듯 두 다리를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나무가 흔들리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이겠지. 스산한 바람이 집 이외의 것들은 전부 쓸어갈 듯 기세를 부리고 있었으나 이츠키는 어째서인지 마음만은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어찌 되었든 내 곁에, 절대로 멀어질 일 없도록 집 안에 있지 않은가. 설령 그것이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없다. 누구 하나 상처 입은 이도 없다. 조금씩 기울어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만 않는다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밤이면 이츠키의 무의식을 부여잡고 아득한 구덩이로 처박아버리곤 하는 예의 공상이, 전기 포트의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제야 겨우 심호흡을 했다. 거짓말과도 같이 바람은 그새 전부 멎은 모양이었다.


 "핫초콜릿이라는 게야. 오늘은 마시멜로도 넣었으니, 조심히 마시거라."
 "고맙데이!"
 "아까 피아노는 왜 치다가 그만두었지? 꽤 듣기 좋았는데 말이다."
 "아, 그기…. 꼭 그 다음이 생각이 안 난다 안카나. 다음에 가르쳐줄 수 있나?"
 "물론이지, 당장 내일 낮에라도 함께 쳐보자꾸나."


 꼭 그 다음이. 이츠키는 순간 공포와도 닮은 무언가가 선득하게 척추를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다만 드러내지 못해서, 그저 웃는 낯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추악하구나, 슈 군. 이제 자라기를 거부하고 시간을 멈춰두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한 게 아니었니? 이대로라면 미카 쨩도 너에게 환멸하고 말 거야. 너는 처음으로 오롯이 혼자가 되는 거란다.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야? 두 귓가에서, 그 시절의 아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녹색 유리안구를 가진 금발의 아름다운 인형. 지금은 어디에 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잃었던 그때의 내가 아닌걸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 지금의 행복을 지킬 거야. 설령 그게 내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라 해도. 그 끝의 끝에서 산 채로 심장을 뜯긴다 해도. 유리케이스가 부서진다. 정원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처럼 버티고 선 이츠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울지 않았다.



 그러니까, 카게히라. 여기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치는 거다. 다시 한 번 해보거라.
 …으응… 그니까, 이케?
 좋아, 이번에는 완벽했다는 게야.
 응앗, 내 지금 스승님한테 칭찬 받은 기가?
 뭐, 네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겠느냐. 예상보다 습득이 빠르니, 뒷장으로 넘어가도 되겠군. 질문은 없나?


 아직 교복을 입던 시절, 문득 피아노를 배웠던 어린 날이 떠올라 점심 시간에 음악실 열쇠를 빌린 적이 있었다. 일찍 식사를 마친 카게히라를 불러내어, 미숙하기 그지없던 그 손길을 어떻게든 건반에 익게끔 하려 애를 썼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지금껏 알 수가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본래 즉흥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왔건만 카게히라를 보고 있노라면 철칙 같은 것은 언제나 뒷전이 되곤 했었기에.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었다. 선을 넘는 계기는 늘 카게히라였고, 제게 있어 중요한 선택 뒤에 카게히라가 서있지 않았던 적 역시 드물었으나 단 한 번도 그 아이가 제게 손을 뻗어온 적은 없었다. 언젠가의 사윈에 꾸몄던 무대를 제외하면. 그토록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곁을 맴돌았으면서 정작, 정작 제 삶에 침투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 표현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 사람. 충동적이었던 시작부터 여기에 서있게 되기까지 매번 달려온 것은 이츠키였고 기다린 것은 카게히라였으며,

 기다리게 한 것은 이츠키였고 멀리서 빛을 따라온 것은 카게히라였다.


 그 아득한 차이를 어렴풋이 직감할 즈음이었을 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슴한 길을 짚어 나가듯 건반 위를 머뭇대며 가로질렀다. 시범을 보여줄 테니 잘 보고 익혀두라는 거다. 익숙하게 쳐오던 악보였음에도 어째서인지 땀방울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잠깐의 정적, 카게히라가 기대하는 듯 숨을 들이쉬는 소리. 그 모든 것을 관객 삼아 인형사는 마침내 이름을 버리고 끌어안은 한 명의 사람을 위해 세레나데를 연주했다. 아주 오랫동안,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다만 그날은 곡을 전부 가르쳐주지 못했었고, 탓에 손 끝에 익은 것은 기껏해야 초반부였을 터인데. 그걸 좀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이제사 후회한들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바람 소리가 창문을 흔들었고 멀리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들려왔다.


*

 
 밤을 헤매고 있노라면 꼭 저의 스승 - 이제는 연인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테지만 - 이 저를 찾아오곤 했다. 카게히라 미카는 입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정원을 거닐던 중이었고, 랜턴을 든 이츠키와 마주쳤을 때는 조금 멋쩍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스승님아, 안 자고 있었나?"
 "…이 시간에 이런 곳에 나와있다간, 감기에 걸리고 말 테다."
 "에헤헤, 스승님이 그 말 할 줄 알구 카디건도 챙겨왔데이. 역시 스승님은 걱정이 많구마."
 "날이 차다는 게야. 랜턴을 가지고 왔으니 함께 돌아가자꾸나."


 손을 내밀자 잠깐 망설이는 것이 새까맣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도 선하게 보였다. 검은 것, 어두운 것이라면 카게히라의 머리칼에서 숱하게 보아왔으니까. 세상의 모든 색을 품고 있는 색, 가장 어둡고도 가장 따스한 색. 그렇기에 가장 익숙한 색.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는 미카의 곁에 있는다는 것은 역으로 어둠에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했다. 새하얀 손을 끌어당겨 맞잡고는 한 차례 웃어보였다. 새벽 바람이 차가워서일까, 평소에도 낮았던 체온이지만 유난히 더 시리다.


 "손이 다 얼었구나."
 "스승님 뺨은 따뜻하네. 내 때문에 식겠다…."
 "어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손가락을 두어 번 꼼지락대더니 이내 깍지를 끼며 손을 맞잡아온다. 내 있제, 무서운 꿈 꿨데이…. 스승님 깨울 수가 없어서 바람 쐬러 나온 기다. 두 사람의 발 밑으로 낙엽이 바스러지며 흩어졌다. 그럴 때는 나를 깨워달라고 했건만, 좀 더 나를 이용해다오. 랜턴을 들지 않은 왼손은 카게히라의 오른손을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꼭 잡고 있었다. 매서워지기 시작한 바람도, 정원을 감싼 편치 않은 공기도 썩 다정하지 못했으나 이대로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카게히라가 걷다 말고 문득, 가만히 이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이츠키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지난날의 저를 본딴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으나 멈출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추악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라면. 가시밭길이더라도 장미꽃이 흐드러진 길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아득하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이제는 환청임을 안다. 그렇다면 곁에 있는 존재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도 알 수 있을 터였으나, 사랑이 인간의 눈을 가렸고 이츠키는 어찌할 도리 없이 인간에 불과했다. 게다가 스스로도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가. 이제 신을 자처하는 건 그만두겠노라고,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겠다고.


 "카게히라, 만약 내가."
 "응?"
 "이 손을 놓는다면, 너는 사라질 텐가?"
 "스승님 가끔 이상한 소리 한데이."
 "…."
 "어데 안 간다. 스승님 놔두고 내가 어데를 가겠나."


 그 순간 이츠키는 모든 예정조화를 사랑스럽게 여기던 자신이 결국은 예상대로 들어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인간과 사랑에 빠졌음을 떠올린다. 그것이 제 몇 가지 죄 중 하나였다는 것 역시도. 가지 않는다는 말만을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리다가, 형체도 없는 그게 녹아 사라질 즈음 카게히라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서있던 것도 잠시, 금세 익숙하게 손을 뻗어 저를 안아온다. 식어가던 뺨이 눈물로 젖어들어갔다. 맨 처음에 시작한 건 자신이니 끝도 제가 내야만 한다. 이 극(劇)의 등장인물은 단 둘이지만 키를 쥔 것은 오직 저뿐이었기에.

 죄를 깨닫고 나자 그 다음은 쉬웠다.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 극은 필시 핏빛으로 끝을 맺게 되리라. 나의 심장을 도려내어야만 막을 내리는 미쳐버린 극이다. 그럼에도 단념하고 칼날을 기다리는 극작가이자 마리오네트이자 죄인으로서, 가장 비참한 끝을 맞이하자. 나의 죄는 멈추지 못함으로써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으니.

 이츠키는 환영 같은 제 사람을 끌어안은 채 울었다. 꼭 제 자신이나 그림자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익숙한 무대에 서면, 스포트라이트가 뜨겁게 내리비춘다. 막이 오르고 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극의 주인공은 단 두 사람이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 자들을 신들의 천국으로 데려가는 이들. 자아낸 말들로 다리를 만들고 별을 띄워 예술의 맥을 잇는 사람들. 두어 번 턴을 하고, 발레 동작을 차용한 몇 가지의 안무가 이어지다가 이내 흐드러지는 꽃잎으로 화한다. 인형사의 품 안에서 활처럼 몸을 휘는 것은 이제 스스로 실을 만지게 된 지난날의 인형, 카게히라가 칼을 쥔 손으로 제 주인의 심장을 노리자 붉은색 조명이 둘의 위로 쏟아진다. 박수갈채를 뒤로 한 채 완전히 암전이 된 뒤에야, 두 사람은 이야기의 여운을 나눈다. 인형사는 소품으로 사용했던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주워 소중히 매만지더니, 반쯤 무릎을 꿇고 사랑스러운 동료에게 건넸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두 눈동자가 기쁜 듯이 휘어지며 웃었다.


 카게히라는 손을 들어 스크린 속 자신의 안무를 따라하다가, 영상 파일의 재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검은 화면이 뜨자 느릿하게 리모컨을 집었다. Valkyrie의 무대다. 동경했고, 상처 입었고, 스스로 몸을 던졌고… 마침내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올랐던. 한때 검은색의 깃털 귀걸이가 떠나지 않던 귓가를 만지작대본다. 늘상 그가 채워주곤 하다가, 결국은 한 쪽씩 나누어 끼기로 했던 액세서리 이상의 소품은 지금쯤 제 방 장식장에 있을 터였다.

 영원히, 예술을 함께하자 했었다. 고고한 예술가이자 제게 있어서는 끝없는 태양과도 같았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땅에 발을 딛고 저와 함께 걷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카게히라 자신에게도 나름의 이정표가 생긴 뒤였다. 명을 다 할 때까지 살아 반짝이는 별처럼, 헤매이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자. 그런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고교 시절의 마지막 무대에서 그는 제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왔다. 일평생 삶을 사랑해본 적 없었을 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주한 눈에서 어느 때보다도 깊은 애정이 읽혔다. 틀림없이 자신을 향해있고, 또한 세상을 향해있는.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었다.


 졸업 이후 그는 1년 간 유학길에 올랐고, 카게히라는 고교 3학년이 되었다. 다른 꿈이 생긴 것만큼이나 하루라도 빨리 그의 곁에서 좀 더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약속된 연인, 예정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이다지도 설렌다는 걸 카게히라가 처음으로 깨닫게 된 나날이었다.


 스승님, 우리 무대는 언제 다시 설 수 있나?
 …곧… 아마도 곧 가능할 게다.
 으응…. 글나.
 많이 아쉬운 눈치구나, 카게히라.
 그야 당연하제, 스승님이 돌아오믄…. 공연도 좀 더 많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잠정 은퇴라캐서 놀랐다 안카나. 참말로 금방 돌아가는 기다?
 그래. 꼭 그렇게 하자꾸나.


 어쩐지 조금 풀이 죽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니, 문득 그가 손을 맞잡아왔다. 체온이 낮은 저에 비하면 따스한 손. 눈을 마주치자 불가항력처럼 웃어버리고 만다.


 혹시, 만일의 사태가 생기더라도.
 …?
 그때는 나를 원망해다오.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카게히라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으로 눈을 휘며 답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기다, 내는 스승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애정으로, 혹은 말하지 못하는 어떠한 감정으로 일렁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눈빛이 슬펐던 것도 같았으나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오후 무렵부터 날씨가 사나워지더니 기어이 눈이라도 내릴 모양이었다. 외출 중인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쌓이면 큰일인데. 연락처를 통하지 않고도 손이 기억하는 그의 번호가 새하얀 키패드 위에 발자국처럼 찍혀나갔다.



*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해. 그, 불편하면 용건만 짧게 하고 갈게…? 어깨를 으쓱하자 양쪽의 길이가 서로 다른 금발이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뒤이어 붉은 눈동자가 잠깐동안 이쪽을 향하더니, 짧은 침묵. 뒤이은 건 상대의 한숨이었다. 중대사라도 전하듯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꺼내든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어."
 "의외구나. 너라면 카게히라를 찾아갈 줄 알았다는 거다, 니토."
 "그야… 그야 물론, 다녀왔지. 그래도 너는, 미카 칭의… 연인이었으니까."
 "…."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 이런 말 하면서 연락한 동창들도,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아라시 칭에게 들었어, 얼마 전에 다녀갔다며."
 "아아, 그래. 세나의 이야기를 하더군."
 "이즈미 칭도 이번 시즌만 끝나면, 귀국하자마자 너 보러 온다고 했어. 그러니까…."


 니토는 한창 이어가던 말을 멈추고 포크를 세로로 세워 접시에 담긴 딸기 케이크를 잘랐다. 잘라만 놓을 뿐 먹지는 않았지만. 조각 케이크 맨 위에 장식된 딸기에 눈이 가자마자 속이 울렁이는 걸 느낀 이츠키가 한창 타오르고 있는 가게 한쪽의 촛불로 시선을 돌리다가 겨우 평정을 찾았다.


 "그 다음 말은?"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
 "이런 말밖에는 못 해줘서 미안하지만, 미카 칭은,"
 "그러고 보니 물을 틀어두고 나온 것 같다는 게야. 이만…."


 미카 칭은 무대에 서있는 너를 좋아했었어, 잊은 거야? 어설픈 핑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똑바로 저를 바라보며 쏟아내는 투명한 송곳에 이츠키는 그만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아직은, 아직은 외부인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


 "…주제넘었다면 미안해, 그래도 나는."
 "…."
 "Valkyrie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 옛 동료로서가 아니라, 마니아의 한 사람으로서."


 목소리가 차츰 젖어들어갔다. 틀림없이 울고 있다. 정도는 같지 않을지언정,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상대. 한때 저의 잘못으로 멀어졌었으나 이제는 감사하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마주볼 수 있게 된 사람. 지금이라면 목 놓아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감정이 그렇게 소리친 순간 어째서인지 머릿속만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가야 하는 곳이 있다.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가야만 하는 곳이.

 나여야만 하고, 내가 아니면 안되는.


 "부탁이야. 지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언젠가는, 그 아이를 위해서…. 다시 노래해줘. 그 아이에게 모든 걸 바칠 것처럼, 무대로 돌아와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응."
 "이미 그러고 있지만 말이다."


 짤막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음악처럼 흘렀다. 다만 이번에는 그 누구도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포크가 접시를 긁는 소리와 찻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정적을 휘감고 돌기를 십여 분, 먼저 돌아가겠다며 이츠키가 양해를 구하고 일어났을 때는 창 밖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니토는 다 식어버린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바람 탓인지 그저 저의 착시인지로 비틀대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이 그토록 깊었으니, 필시 쉽게는 보낼 수 없는 것이리라 그저 짐작할 따름이었다.


*


 너무도 깊이 베어버려,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순간의 참상을 떠올리게끔 하는 단어가 있다. 이츠키는 눈발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눈보라가 쏟아지는 도로를 따라 다급하게 운전했다. 부재중 목록에 찍혀있는 이름은 연인의 것이었다. 카페를 나서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아 응답이 돌아왔다.


 — 스승님아, 어데가? 하도 안 들어와서 전화했데이. 밖에 눈이 억수로 온다 안카나. 길 미끄럽제?
 "잠깐 살 게 있어서 나왔다가 휘말려버렸구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게야. 네게 줄 쇼트 케이크도 샀으니, 내일 티 타임에 먹자꾸나."
 — 응, 그러자! 참, 근데 스승님. 내 있제.
 "듣고 있다는 거다."
 — 오늘은 메인테넌스 좀 해줄 수 있나?


 끼익.

 순간 평정을 잃은 손이 핸들을 놓쳤다. 주위에 오가는 차라고는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바로잡고 난 뒤에는, 들이받지 않은 것이 기적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가로수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메인테넌스, 다른 말로는 유지 보수. 카게히라와 저 사이에서만 쓰이는 말이었고, 어둠 속을 헤매일 때 제 손을 잡아 일으켜준 말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 사무적인 느낌이 가시고 연인들의 일상처럼 자리잡아가던 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내가 살아가던 이유, 그 아이가 살아가던 이유, 그 모든 것의 까닭이자 근원. 이츠키는 가빠오는 숨을 견디지 못하고 가까스로 차를 갓길에 정차시켰다. 여보세요, 스승님? 스승님아, 듣고 있나? …이상하네, 끊겼나….


 휴대폰 너머에서 저를 찾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보다도 먼저 그의 귓가를, 정신을 파고든 것은 환청임이 명백한 그녀의 - 혹은 제 자신의 - 목소리였다. 전부 네가 초래한 일이잖니, 슈 군. 그러게 미카 쨩이 네 손을 떠났다는 걸 좀 더 일찍 깨닫고 인간답게 놓아주었더라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식은땀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았다. 기억이라면 여전히 끔찍하도록 생생하다. 창백해진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보았지만 핏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카게히라, 시간이 꽤 늦었다는 게야. 어디쯤 오고 있지?
 응아? 아, 내 인자 거의 다 왔데이. 한 십 분이믄 집에 도착할 기다.
 날이 어두운데, 마중 나가마.
 에이, 그럴 거 없다. 내 지금 나루 쨩이랑 같이 가고 있구, 여기 알바하는 데서만 통하는 지름길이라서 스승님은 잘 모를 거구.
 …흐음, 나루카미와 함께인 건가.
 응, 지금 옆에서 목소리 들리제?
 확실히 들리긴 한다만…. 그래, 조심해서 오거라. 창문으로 보이거든 현관에 나가있으마.
 에헤헤, 그래주면 고맙제. 이따 보자, 스승님아! 아, 그리고 있제.
 듣고 있다.
 내 집에 가믄 메인테넌스 해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단다. 어서 모든 걸 고백하고… 네 죄를 뉘우치렴. 더는 사람도 인형도 아닌 아이를 어떻게 점검하겠다는 거니? …아아, 이건 더 이상 그녀가 아니다. 제 안에서 갈라져나온, 아니, 제 자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가장 밑바닥의 목소리였다.


 "그만, 그 입을, 닥치라는 게야. 이츠키…!"


 그 짧은 순간에도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었음에 감사할 틈도 없이, 터져나온 눈물을 저지할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여전히 감긴 채인 두 눈 앞으로, 구역질이 나도록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날의 사건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츠키 선배?
 네가 전화를 걸다니 드문 일이구나, 나루카미. 오늘도 카게히라와 카페라도 들렀다 올….
 미카 쨩이…. 내가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러니까…. 나랑 인사를 하자마자, 집 앞 횡단보도에서…….


 일면식도 없는 구경꾼들이 피워댄 소란에 나루카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틀림없이 꿈이다, 우선 깨어나자. 깨어나서, 여느 때처럼 카게히라의 방 문을 두드리고, 잘 잤느냐고 인사를 건네고…. 분명 머리로는 그렇게 믿고 싶은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잠옷 차림으로 떠밀리듯 도로 한복판에 서있었다. 어느 틈에 어떻게, 무슨 정신으로 그곳에 걸어간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카게히라가 즉사했다고 말했고, 나루카미는 제 절친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울었지만, 이츠키는 울지 않았다.

 정말이지 조금도,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하염없이 멈춰서서, 분명 제 뜻대로 움직일 터인 군중이 허락도 없이 제 하나뿐인 인형을 들것에 싣고 저를 구급차에 태우는 것을 남의 일인 양 바라볼 따름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멈춰있는데 대체 어째서. 울음을 참는 것인지 혹은 다른 감정을 억누르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츠키의 표정이 차츰 일그러져갔다. 그 아이가 세상에 왔던 날과 비슷할 법한, 쨍한 겨울날이었다.

 카게히라가 이야기한 '이따가'는 영원히 오지 않았고, 메인테넌스 역시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못할 말이 되고 말았다.




 장례식이 끝난 뒤 몇 주동안은 끔찍하게도 고요했다. 외부의 누구도 이츠키를 찾지 않았을 뿐더러 그가 밖으로 걸음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먼지가 쌓여서, 천 년 뒤쯤에나 발견되면 좋을 텐데. 이따금 그런 생각도 했다. 카게히라의 방은 아직 치우지 못했다. 집에 사람을 들이면 그 이야기부터 나올까 아직은 누구도 얼씬하게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었기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까, 제가 쏘는 화살은 매번 스스로의 심장으로 향하기 일쑤였다.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발할라일 터인데. 그 아이는 제게 지옥까지 함께하자 했으나, 필시 천국에 갔을 테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웃을 때마다 갈 곳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함께 활동하던 시절의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다가, 식음을 전폐한 탓에 화면만 움직이게끔 내버려두고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다. 지난날 신을 자처하던 이는 하나뿐인 신을 잃었고,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말이었다. 신이 사라지면 그의 신도 역시 길을 잃는 법이니까.

 이제 하늘에는 더 이상 별이 뜨지 않는다.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츠키는 흐려진 시야를 바로잡았다. 눈물을 닦아낸 그가 다시 힘 주어 악셀을 밟았다. 우선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를 기다리는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과거의 환영도 망령도 아닌, 두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품에 안을 수 있는 연인이 있는 곳으로. 제 목소리를 빼닮은 환청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눈이 거의 그친 뒤였다.


*


 집 안으로 들어서자 예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도착한 줄도 모르고 몰두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여느 때와 같은 부분에서 멈춘 카게히라의 선율을 이어주었다.


 "아, 스승님 왔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들었구나."
 "아이다, 눈 오는데 스승님이 고생했제…. 오늘은 내 이거 마저 가르쳐줄 기가? 아, 스승님 피곤하믄 가볍게 멘테만 하구 자도 된데이. 내 요즘 멘테 못 받은 지가 몇 달인지 모르겠다 안카나."


 한 손은 카게히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채로,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잡아 피아노 건반 위로 이끈다. 채 이어지지 못했던, 이어질 수 없었던 음을 제 손 아래에서 카게히라가 연주해간다. 그 음악에 홀린 것일까, 혹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한 이성의 마지막 외침이었을까. 건반을 짚어가던 이츠키의 손이 문득 멈추더니 연인의 손을 맞잡았다.


 "카게히라, 만약 내가 말이다."
 "응?"
 "이 손을 놓거나,"
 "…."
 "혹은… 네게 모든 걸 털어놓는다면, 너는 나를 떠날 텐가?"


 어떠한 악의도 담지 않은, 순전한 호기심에 찬 눈빛이 저를 향한다. 그럼에도 온몸을 난도질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 눈을 마주하기조차 힘든 것은.


 "스승님 또 그런 소리 한데이…. 내는 스승님이 가는 데라믄 어데든 따라갈 거니까 괘안타고 했제."
 "나의 아집으로 너를 붙들어매고 있다 해도?"
 "…응."


 그 순간 이츠키가 카게히라의 눈에서 마주한 감정은, 그 언젠가 -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고교 시절에 보았던 것이었다. 한없는 신뢰에 하나뿐인 연인을 향한 애정이 겹쳐진. 제게는, 그런 애정이 남아있던가. 한때 남아있었다 한들 이제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터였다. 곧 모든 것이 끝나고 말 테니.


 "카게히라, 나는 한때 인형을 고치는 일에 아주 능했었다는 게야."
 "응, 내도 안다. 내가 주워온 인형 씨들도 스승님이 귀엽게 고쳐주지 않았었나."
 "하지만, 나는…. 인형도 사람도 아닌 자는, 고치지 못해."
 "…응?"
 "지금의 너를 메인테넌스할 자격은, 아니, 지금의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조차도 내겐 없다는 뜻이다."


 언제쯤부터 몸에 지니고 다녔을까, 외투 주머니에서 이츠키가 찾던 물건을 꺼내놓기 무섭게 카게히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늘 당당하기 그지없던 눈앞의 사람이 난생 처음 보는 모습으로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카게히라, 혹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나루카미와 함께 걸어서 돌아오곤 했던 샛길을 기억하나."
 "물론이제. 근데 스승님은 가본 적 없지 않았나?"
 "있었다는 거다. 딱 한 번."
 "있었구나…."
 "네가 죽던 날 밤이었어."


 어떤 말이 돌아올까. 속사포처럼 모든 것을 쏟아내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듯 끝내 두 눈을 감아버린 이츠키의 두 어깨에 있을 리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뒤이어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카게히라."
 "스승님이었구나."
 "……."
 "스승님이, 내를, 살려서."
 "그게 아니다."


 단도를 카게히라의 손에 쥐어주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용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죽음을 더럽힌 나를 찔러다오. 나를… 네 손으로 벌하는 거다. 손 끝이 기억하는 선율은 여전히 덧없게도 달콤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몇 초나 흘렀을까, 음악을 끊은 카게히라가 제 심장 쪽으로 이츠키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와, 한참 전부터 미소 짓고 있었던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이거, 들리제? 스승님이 내한테 선물해준 심장 아이가."
 "…."
 "내는 못 봤지만, 분명 예쁜 것들로 만들었을 것 같데이. 보석일까, 아님 태엽일까…. 어느 쪽이라도 내는 좋지만."


 속죄의 시간을 놓친 죄인은 무력하게 집행인이 도로 건네주는 단도를 받아들 뿐이었다. 맨 처음에 내 심장을 뛰게 해준 것도 스승님이니까, 다시 뛰게 해주는 것도 스승님이어야 말이 되제. 단단히 맞잡은 손 사이로 피보다도 진한 무언가가 흘러갔다. 최종 집행이 목전이었다.


 "같이 죽자, 스승님."


 그 웃는 얼굴에서, 발키리에라는 활동명의 실체를 떠올렸던가. 명운을 다한 전사들을 이끄는 전장의 신. 카게히라는 그야말로 발키리 그 자체였다. 이츠키는 비로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그렇게 할까."
 "응. 우리는… 지옥까지 함께니까."
 "너는 천국으로 갈 것 같지만 말이다."
 "스승님이랑 이래 꼭 끌어안고 있으믄, 어딜 가도 같이 가게 될 기다."


 이제, 죄도 피로써 전부 씻어버리자. 그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 발키리였던 카게히라가 묘약 같은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 기계 심장과 아직까지는 살아, 혈액을 흘려보내는 심장이 번갈아 거세게 뛰고 있었다. 머지않아 막이 내려올 테지, 불이 꺼지면 우리는 같은 곳에서 웃고 있을 수 있을까. 아스라하게 들려오는 커튼콜 요청을 뒤로 한 채 마지막으로 입을 맞췄다. 환호성은 둘의 숨소리로 족했다. 더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밤의 어둠이 두 연인의 비극을 감싸안는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개의 심장이 모두 멎었을 때에도, 시곗바늘만이 기계 심장과 흡사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