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_전력
30차 전력 주제 : 끝/시작
느리게 걷는다는 것
만약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할 것 같나요?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받았던 질문을 떠올린다. 아티스트 이츠키 슈는 느리고도 신중하게 답변을 골랐다. 새 의상의 드레스코드를 정하듯이, 신곡의 화음을 쌓듯이.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조금 웃는 얼굴로 내린 그때의 답변은 지금도 집에 있는 잡지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사실 이제 와서 털어놓자면 그날의 미소는 비즈니스도 무엇도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 이라고 언제부터인가 무게도 방향도 완전히 달라져버린 그 말을 혀에 얹을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낮의 햇살처럼 맑고 따스한 덕택이었다. 카게히라 미카, 성씨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늘 얼굴에 한가득 품고 다니며 저에게도 태양을 보여준 사람. 눈을 뜨면 세상이 끝나있기를 바랐던 시절, 모든 것의 끝이고 시작이었던 사람이 제 옆에 남기를 택한 것은 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출발을 고한 마지막 무대는 이제껏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불과 오늘 아침에도 맞잡았던 손의 감각이 어렴풋이 되살아난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변치 않는 것은 분명 있다. 그 당연한 이치를 떠올리자 어쩐지 코 끝이 찡해오는 걸 간신히 지나치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개인 스케줄이 있다며 저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선 미카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같이 들어가자고 적힌, 무미건조한 휴대폰의 폰트조차 사랑스러워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미카도 분명 같은 물음을 받았었다. 유리구슬 같은 두 눈을 신중하게 굴리는가 싶던 아이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날짜가 바뀌기 직전까지 저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고. 세계가 끝나도 Valkyrie는 영원하니까, 날짜가 바뀌는 것쯤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고 커튼콜 요청에 응하고,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내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행동하겠노라고. 그 말을 들으면서 저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차츰 느려지던 걸음이 뚝 멎었다. 조금 춥다고 생각하며 눈앞에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원단을 사러 나온 참이었고, 미카와 함께 귀가할 예정이니 서두를 일도 없었다. 무심코 내쉰 한숨이 하얗게 퍼져나갔다. 얼핏 카게히라, 그 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른 것도 같았다.
내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수십 번의 무대를 함께했고 호흡을 맞춰본 횟수라면 수백 번을 넘길 터였으나 미카의 그러한 여유는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인에게 이야기하면 누가 누굴 부러워하느냐고 말할 터였으나, 슈에게는 미카가 가진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부러웠다. 그게 본래 타고난 것인지 혹은 수도 없이 무대에 오르고 기량을 닦음으로써 익힌 것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오전 시간이라 비교적 아파트 단지 안은 한산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렵다는 게야, 나는."
마지막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품어본 게 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시야가 낮고 체구가 작았을 시절, 놀이터에서 또래 녀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때였겠지. 혹은 밑바닥까지 떨어져 회생할 길이 없다 믿었던 유메노사키에서의 일이든가. 모두 돌이켜보면 돌파구는커녕 숨을 곳조차 없는 것 같았으나 어떻게든 빠져나왔었다. 그 증거로 지금 제가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두려움은,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데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었다. 어쨌든 시들어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 사이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았기에.
슈는 제 자신에게 보내는 질문을 바꿨다. 만약에 내일 내가 죽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너무도 간단하고 진부해서 구태여 입 밖으로 낼 필요조차 없을 듯했다. 무대에 오른다, 의상을 만든다, 좋아하는 장소에 간다…. 행동은 전부 달랐지만 앞에 붙는 수식어는 오직 하나였다. 카게히라와 함께. 언제부터 그 아이가 이토록 제게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 되짚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식하고 나자 늘 제 곁에 있었다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곁을 지켜주고 알지 못했던 지평을 열어준 하나뿐인 연인에게 붙일 수식어로는 다소 무책임할지 몰랐으나,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몇 가지의 대답을 더 찾아내고 나니 왠지 모를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갔다.
너의 세상에서 나는 얼마만큼의 입지를 차지하고 있을까. 한때 너의 자그만 앞마당에서만큼은 내가 곧 전부이며 신적인 존재라는 것에 취해있던 적이 있었다. 안일하다 못해 회피에 가까웠던 시기를 지나니 차마 묻기조차 망설여지는 때가 왔다. 마침내 내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계절은 한참 헤매이고 나서야 비로소 도래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불과 엊그제 일 같았다. 그런데도 이제는 정작 제가. 잠식당한 것이 아니라, 스며들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제 하늘에 뜨는 태양이 카게히라는 아니었기에. 다만 그걸 볼 때면 그 아이의 아침 잠버릇이며 휴일이면 꼭 이마에 키스를 해야만 눈을 뜨곤 하는 세세한 일상이 떠올라버리는 것이었다. 미카에게 있어 제가 인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비슷했으리라 생각했다. 세상을 둘러싼 것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물일 뿐이다. 단지 그걸 보면서 떠올리는 게 오직 한 사람에게로 귀결된다는 것, 그러한 것을 설명할 말로 적합한 단어를 슈는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못 견디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여유가 나거든 전화를 걸어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때마침 휴식 중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벨소리가 울렸다. 여느 때와 같이 전화를 받으니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가 힘껏 반겼다.
— 응, 내다. 스승님.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
— 당연하제! 아, 그리고 예정보다 좀 일찍 끝날 수도 있데이.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그때 보자?
"그래, 데리러 가마."
— 응, 내도 스승님 만날 생각 하면서 열심히…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해달라캤나? 뭔 일 있는 건 아이제?
잠시 귓가에서 휴대폰을 떼고 숨을 골랐다. 자칫 실언할 뻔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을 때는 이미 수화기 너머에서 미카가 저를 찾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느냐. 그저 보고 싶었다는 게야."
보이지 않을 테지만 어떻게든 웃었다. 아마 지금쯤 그 아이도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제야 안심한 듯 저도 보고 싶었다며 답을 돌려주는 연인이 고마웠다. 잠깐의 연결이 끝나자 다시금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 두려움도 고통도, 혹은 사랑도 될 수 있는 간극이었다. 정밀 검사의 결과 발표는 내일이다. 내일이 밝은 뒤에도, 아니 당장 오늘이 끝나갈 무렵에라도 미카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주할 수 있을까. 답을 내리지 못하고 헤매이는 낯빛이 그저 희었다. 이 모든 것이 기우라면 좋겠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신변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지금껏 뇌리에 박힌 기억 탓이 크겠지만, 예술의 정점을 찍거든 제 발로 물러서겠노라 큰 소리를 냈어도 이토록 갑작스레, 그것도 자의도 아닌 타의로 물러나야만 하는 상황은 이때껏 논외였기에. 그래서 두려웠고, 못 견디게 불안했다. 남겨두고 가기에는 눈이 시린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나란히 누워 잠들지 않는 날이 없는데도 매일같이 꿈에서마저 밀어를 나눠온 미카만 해도 그러했다. 도저히 사랑하는 이를 두고 떠날 재간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결국 자신은 신도 무엇도 아닌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잘못 간수한 털실처럼 한데 엉켜 풀어지지 않는 감정은 미련임이 확실했으나 그렇다고 단숨에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이유야말로 너무도 인간적이며 현실적이라, 결국 조금 울어버렸다. 온통 안개뿐이라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이토록 유약해지는 것이 인간이라고, 뼈 저리게 느끼면서.
새삼 지난날의 폭군을, 황제라 불리던 이를 떠올린다. 끝이 정해져있는 - 지금도 이따금 연예 지면과 광고에서 보이곤 하는 얼굴이기에 이제 와서 별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 삶을 사는 사람은 누구든 그토록 거칠 게 없어지는 것인가. 하긴 지금의 슈라고 해도 스물 하고도 다섯 해를 조금 넘긴 제 삶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 같은 건 없을 듯했다. 너희는 좋겠네, 내일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자신할 수 있어서. 뒤를 돌아 멀어지던 푸른색 눈동자가 되살아난다. 저도 모르게 말아쥔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는 말이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부풀려 걱정하는 악취미는 없었는데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시간은 더없이 느리게 흘렀다. 그러니까 원단을 사러 나왔는데, 이렇게 멍하니 실 끊어진 인형처럼 멈춰있을 작정이 아니라. 사람을 만날 계획도 없건만 스스로에게 일깨우듯 습관처럼 끼고 나온 반지를 한 번 내려다본 뒤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곡의 컨셉은 미카가 정하기로 했으니 그 아이가 자주 쓰던 색 위주로 골라볼까, 그보다 작업은 언제쯤 들어가면 괜찮을까…. 본래 지나치게 서두르는 편은 아니나 어째서인지 곧바로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강박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그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남겨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신곡으로도, 아무리 공을 들인 의상으로도 메꾸지 못할 것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다면. 슈는 드물게 눈앞에 있는 문을 열기를 망설였다. 역시 두렵다. 두 발을 딛고 있는 땅이 한 바퀴를 빙 도는 것처럼, 한참이나 현기증이 일어 붙박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둘러싼 세상이 이대로 멈췄으면, 그런 무책임한 생각을 했다. 자주 들르던 상점가에 걸음했는데도 마음에 차는 걸 찾지 못해서, 몇 번이나 가게를 들락거리다 전철에 몸을 실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즈음이었다. 간간이 저를 알아본 사람들이 서로 귓속말을 하는 게 보였으나 손잡이만 힘주어 잡을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광고판에는 얼마 전 미카와 함께 찍은 의류 브랜드의 CM이 큼직하게 실려있었다. 애써 화면 속 자신의 눈을 피하고 내릴 역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는 바라보지 않았다.
"스승님!"
협동작업을 하기로 한 츠키나가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마친 미카가 제법 먼 거리에 서있던 저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늘은 녹음이 제법 잘 되었다, 중간에 츠키나가 선배가 막힌 부분의 가사는 내가 메꿨다는 등의 무용담으로 눈을 빛내는 걸 보고 있자니 그제야 제가 살아있음이 실감 났다. 내일 나의 세상이 어떻게 되든 너만큼은, 가로등 불빛도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로 바꿀 줄 아는 너라면. 들떠서 혼자 저만치 앞서나가던 미카가 뒤늦게 바로 옆으로 되돌아왔다.
"와 그라나, 뭐 두고 온 거라도 있는 기가? 아이다, 스승님은 스튜디오 드가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이 얼굴과. 필시 낮에 통화를 할 때도 휴대폰 너머에서 지었을 표정이었다. 머릿속에서 길게 이어지던 생각이 일순 뚝 끊어짐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미카를 힘껏 끌어당겨 안았다. 조금 의아한 얼굴로 이제는 거의 비슷해진 시야를 헤치던 미카가 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몸이 식을 정도의 추위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카게히라."
"응, 내도."
"…."
"내도, 우리 스승님 많이 보고 싶었데이."
본래 제 사전에 고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성격이었으나 그게 과도한 걱정으로 이어진 적은 손에 꼽았다.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려, 이미 내일이면 열게 될 거대한 문 앞까지 와버렸다. 눈앞에 있는 문을 여는 것 역시도 자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익숙하고 따스한 손길이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게 느껴졌다. 초겨울이다. 온 세상이 하얗게 잠들 준비를 하는 계절에 잠깐이나마 단 둘만 온기를 품고 있어도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슈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한 손으로 문을 밀어젖힐 때 다른 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길 낭떠러지가 아니라, 예상치도 못한 어딘가의 화원으로 이어지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저 잡은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날짜가 바뀌기까지는 아직 제법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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