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_전력
7차 전력 주제 : 새장
이제 그만 그 아이, 놓아주는 게 좋지 않을까? 카게히라 군은 이츠키 군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능하지 않아. 언젠가의 황제가 제게 했던 말이다. 언제나처럼 소중하게 앤틱인형을 받쳐들고 있던 오른손에 평소답지 않게 센 힘이 들어갔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게 표정에도 역력히 드러났으리라. 그걸 텐쇼인은 놓치지 않고, 다만 제가 화가 난 지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 눈치로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었다.
"후후, 이츠키 군. 굉장히 기분이 상했다는 표정이구나. 그 아이가 가진 재능, 이츠키 군이라면 당연히 눈치 챘을 줄 알았는데 의외인 걸. 그도 아니라면, 설마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가엾은 아이를 계속 네 옆에 묶어두려는 걸까?"
다음번 발키리의 무대를 기대할게, 그땐 몇 명이 있을지 궁금한데. 진짜 인형은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할 수 없잖아?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한 채, 형편없이 미간을 찌푸린 제왕을 지나쳐 유유히 걸어가버린다. 슈는 그제야 손에 아플 만큼 들어갔던 힘을 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대응할 가치도 없었다는 건 인정하는 바였으나 텐쇼인이 건드린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기에, 궁극적으로는 그 아이를 노리고 있었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카게히라가 - 황제의 말에 따르면 제가 생각하는 만큼 - 무능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저려올 만큼 생생하게 깨닫고 있었으며, 그걸 상기할 때면 박탈감이나 배신감보다도 앞서는 건 단연 자부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보다 결정적으로 이츠키의 성역을 침범한 한 마디는, 이제 그만 손에서 놓으라는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일전에, 아이를 시험하려 들었던 적이 있다. 소중한 줄 모르고, 그 아이가 저를 살게 하는 것도 모르고 몇 번씩 모진 말로 매도하며 나를 떠날 테면 떠나보라고 온갖 몽니를 부렸던 시절이 있었다. 끝은 늘 이츠키의 항복이었고, 기나긴 싸움의 승자는 카게히라였다. 제가 남겨놓은 상처를 인형의 목 뒤에 남기는 인장이라도 되는 양 한가득 끌어안고 웃어보이던 미카에게만큼은 이길 도리가 없었다. 져준 것도 아닌 완전한 패배였다.
발키리는, 그러니까 이츠키가 결성한 유닛은 원래부터 관객들에게 아첨하는 걸 싫어했다. 아무도 웃지 않고,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해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직진한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한때 자신의 인형이던 이가 정면으로 찔렀을 때는 어찌나 아프던지. 그 옆에서 차마 소리내어 울지 못해 큰 소리를 내던 카게히라를 제지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무대를 다시 한 번 꾸며보자며 손을 이끈 것은 물을 것도 없이 그 아이였고,
스승님, 봐라. 오늘도 손님들이 윽수로 많이 와줬다 안카나!
눈을 감았다 뜨면 꿈처럼 그 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 속 한 장면으로 끌려들어와있기 마련이었다. 사이리움과 관객들의 환호가 한데 섞여 하얗게 부서지는 가운데, 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인형의 환한 미소뿐이었다. 금안과 청안을 빛내며 자신을 돌아보던, 기적 같은 까마귀 인형의.
그리고 그걸 위해 다시 무대에 서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사랑에 가장 가까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오직 그것뿐이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나다운 모습으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너에게 전해주리라. 그 눈에, 그 마음에 깊숙이, 다만 아프지 않게 새겨주리라고. 그렇게 마음먹은 뒤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난날 저를 뛰게 했던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오로지 너를 위한 무대, 너를 위한 마음. 낯설어서 입에 올리기조차 망설여지는 그 이름을 다만 소중히 끌어안은 채 몇십 번을 무너지고 몇백 번을 절망했다. 진즉에 날개를 펴고 저를 떠나 마땅했을 그 아이가 갇혀있던 새장이 녹슬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로.
끝날 줄을 모르고 연습을 이어가던 어느 날, 거울 속 자신을 연신 눈으로 좇던 미카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불과 방금 전까지 격한 안무를 이어가던 터라 움직임이 잔뜩 가팔라진 등으로 툭, 작은 머리통이 와닿았다. 뒤이어 불쑥 뻗은 두 팔이 허리를 끌어안은 것은 순간이었다.
"…카게히라?"
더우니까 떨어지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테지만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제 등으로 머리를 묻어버리는 통에 뭔가 더 나오려던 말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숙여, 서로 세게 맞잡은 두 손 위로 가만히 손을 겹쳤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몇 분이 흐르고, 들리느니 두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더는 인형이 아닌, 인형일 수 없는,
"…스승님."
등 뒤에서 나지막이 저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사람.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불쑥 뒤를 돌아 그 동그란 두 눈과 시야를 같게 하고, 어떤 말이라도 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힘껏 저를 끌어안고 있는 두 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그가 차츰 몸에 힘을 빼는 걸 느꼈는지 미카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데이."
그리고 분명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그 한 마디에 눈앞의 세상이 정지하고, 간신히 버티며 뛰고 있던 심장이 예고 없이 내려앉는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한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어서.
"스승님은, 스승님인 걸로 족한 기라."
"…."
"여서 더 완벽해질 수 있다믄 좋겠제. 그래도, 우리 무대를 위해서 스승님이 망가지는 기는, 내도 싫다. 내가 무리해서 연습할 때는 늘 이래 스승님이 막아주지 않았었나."
"…."
"그니께, 너무 무리하지 말아도. 내는 스승님이 뭐라도 좋으니께."
"…카게히라."
"내, 절대로 안 떠난다. 스승님이 내한테 싫증내도, 꼴도 보기 싫다캐도… 절대 딴 데로는 날아가지 않는데이."
"…."
"여기만이… 내가 사랑받을 곳이니께."
여느 때 같았더라면 있을 곳, 이었을 단어가 그새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 미카와 눈을 맞췄다. 까마귀는 제법 영리한 새라고 했었나, 어느새 제가 사랑받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모종의 놀라움마저 일었다. 다만 아직 이것은 모르리라.
"너는 지금, 사랑받고 있는 건가."
"응."
"나로부터?"
"당연한 거 아이가?"
마치 입력된 명령어를 불러내기라도 한 듯 적절한 때에 적절한 답을 내린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햇살처럼 한가득 쏟아지는 익숙한 손길에 아이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다. 네가 나로부터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그 깊이만큼은 앞으로도 가늠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이 감기려는 틈을 타, 짧게 입술을 훔쳤다. 이런 반응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기에 좀 더 혼란에 빠트릴까 하다가 이내 관뒀다. 다만 마주보며 조금 웃었다. 자신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나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던 감정에 뚜렷이 정의를 내려줘서, 고맙다고.
다른 어떤 말보다도, 누군가로부터 가장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내게 해준 사람이 너여서, 기쁘다고.
더 이상 헤매이지 않을 이유를 찾아줘서, 나를 가두고 있던 또 다른 새장으로부터 꺼내주어서. 그제야 거짓말처럼 숨이 트였다. 어디에 있든 기다려줄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고 해도 곁을 지켜줄 사람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는데. 방심한 틈을 타 미카가 가슴팍에 머리를 부벼왔다. 떠나지 않겠다고, 어딘가로 날아가버리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되새기듯 말했다. 그제야 알았다. 네가 살던 새장은 이미 그 구실을 못하게 된 지 오래였으며, 지금껏 그 낡은 곳을 떠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네 마음이 시켜온 일이었다는 걸.
긴 말을 하는 대신 조심히 얼굴을 쓰다듬으며 거의 맞닿기 직전이던 입술이 다시금 카게히라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마침내 사람이 된 인형은 놀라거나 밀어내는 대신 인형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지루하기보다 달콤하게 흐르는 초침의 소리를 들으며 이츠키는 생각했다. 그 황제에게도 계산 착오가 있었음을. 어찌 되었든 이 이야기는, 하나뿐인 인형의 미소로써 완성되는 것이라고. 마침내 내려오는 막의 뒤편에서 지난날의 제왕은 그를 비웃는 대신 아낌없이 눈앞의 사람에게 집중했다. 고요히 날개를 접은 때마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새장을 벗어난 까마귀는 멀리 날아가는 대신 고맙게도 제 손 위로 가뿐히 내려앉아주었고, 잠깐이나마 곁에서 날개를 쉬게 했으면 하는 바람에 제왕은 앞으로도 같은 자리를 지킬 심산이었다. 저만 바라보는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비로소 갑갑한 공간에서 벗어나 같은 하늘을 가를 때가 되었다. 감정의 깊이도, 아직 말할 수 없는 어둠의 깊이도 차차 깨닫게 되리라. 그런 날이 온다면 힘껏 마주보며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주겠노라고. 지금은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다 해도 그저 이 길 위에서 발을 맞춰 나아가고 싶었다.
이제는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새장의 열쇠를 떠올리며 두 사람은 또 다른, 하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마주한 푸른 창공은 그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높고 눈부시게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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