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Unbirthday

Rachieh 2017. 12. 12. 14:35

 #슈미카_전력

19차 전력 주제 : 선물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그해는 꼭 하늘에서 내리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첫눈이 일찍 내렸다. 하늘 아래, 그러니까 땅 위에서 정작 제가 눈 녹은 물이라도 떨굴 듯 빈정 상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는 큰 키의 호리호리한 묘지기에게는 조금도 환영받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칫, 보일 듯 말 듯 얇은 입술이 움직였다. 문상이랄 것도 받지 못해 창백한 죽음의 장막 위로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한 겹 더 덮어쓴 묘지 옆에는 자그만 집 한 채가, 그러니까 묘지기의 거처가 마련되어있었다. 아마 올 겨울도 눈을 퍼부어댈 모양이지, 벌써부터 이토록 요란스러운 걸 보면. 제 생일 - 에 이어 죽은 이들이 돌아온다는 날 - 도 이미 지났으니 동네 아이들이 담력 시험을 치른다며 몰려오는 일은 없겠지만 머지않아 성탄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도 잊고 있었다. 곧 있으면 성탄을 맞이할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거리는 한켠에서 제 자신을 말벗삼아 살아가는 묘지기의 삶 따위에 내어줄 자리 같은 건 없었을 테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관 없었다.


 마을의 묘지기, 이츠키 슈는 이제 막 우려낸 홍차를 잔에 따라내어 집무용이라기에도 뭣한 책상으로 향했다. 탁, 소리나게 내려놓자 잔에 든 홍차가 아슬아슬하게 튀어올랐으나 다행히 넘치지는 않았다. 향을 맡고는 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좁은 공간에 홍차 향이 퍼지기를 기다리던 그가 가만히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창 밖에서 친우의 이름을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득하다. 제 이름은 언제 저렇게 불려봤었지. 그 기억 또한 손이 닿지 않는다.

 목 없는 묘지기.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면 이름인 셈이었으나 슈 본인은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 겁도 모르고 근방에 발을 들인 아이들을 겁주어 내쫓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많았다. 어쨌든 분명 제 표정에 겁을 먹고 달아났을 게 아닌가, 그럼 얼굴도 똑똑히 보았다는 뜻인데 목이 없기는 누가.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 목 뒤로 넘기는 차는 오늘따라 넘김이 좋았다.


 하기야 목이 없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자신은 말을 하지 못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제 말이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짚이는 정황 또한 쓸데없이 선명해서 그는 차라리 포기하기로 했다. 속세에서 버글거리는 인간들에게 전할 말 같은 건 애초에 없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묘지기로서의 숙명과도 같은 진혼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갈 곳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에게만큼은 제 목소리가 또렷이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천계의 황제인 체하던 텐쇼인의 계획도 반쯤 일그러진 게 되어버렸다. 슈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웃는 얼굴을 흉내내었다. 내 목소리를 앗아가봤자, 차라리 이 목숨을 거둬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대로 반쯤은 성공이라는 생각도 들어 다 식었다고 생각했던 화가 울컥 치솟으려는 찰나, 창틀에 쌓인 눈 너머로 길고 가느다란, 검은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이니 명암이 분명치 못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완전한 밤도 아닌데 너무 검지 않은가. 그림자라기에도 애매한 것이, 차라리 검은 옷으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둘러싼 사람의 형체 그 자체라고 보는 게 무방할 듯한 모양새였다. 쉬지 않고 흔들리는 게 묘지인 줄 모르고 보았더라면 파수꾼이 허수아비라도 세워둔 줄로만 알 것 같았다. 다친 건가, 길을 잘못 든 건가. 슈는 반도 마시지 않은 차를 그 자리에 내려놓은 채 외투도 걸치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낡은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등 뒤로 닫혔다.

 
 그새 눈이 쌓여 제법 미끄러워진 길을, 그것도 비석으로 가득한 틈새를 용케 헤치고 걸어갔다. 사람인가? 이 계절, 이 시간에 여기까지 굳이 걸음할 얼간이는 없을 테지만 연말이라 유입객이 늘어난 것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그것도 목격자라고는 괴팍한 묘지기가 전부일 묘지 한가운데에서 험한 일을 겪는 건 그 누구라도 원치 않을 것이기에, 슈는 더욱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차츰 가까워지는 인영은 바람이 부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리는 모양새가 위태로웠으나 다행히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래도, 잘못 건드렸다가 아직도 제법 많이 이 근처를 떠돌고 있는 혼을 깨웠다가는 큰일이니. 가팔라진 숨을 고르며, 비로소 눈이 마주칠 거리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제 추측이 옳았다. 저보다 조금 낮은 시야, 검푸른 머리칼과 그와 대조되는 새하얀 얼굴. 그 아래로는 빈 틈 없이 검은색 옷가지로 둘러싸여있다. 잘 보니 그 검은색은 안에서 솟구치는 핏방울이 가미된 것 같기도 했다. 무심코 눈살을 찌푸리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너, 마을의 아이는 아닌 것 같다만."
 "…."
 "어디서 온 누구지? 아니, 일단 외부에서 온 게 맞긴 한 건가?"
 

 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인간이라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 아닌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찾으려 애를 쓰던 슈의 귀에, 들릴 리 없는 말소리가 들렸다.


 "…라."
 "…?"
 "카게… 히라. 그기, 내 이름이다."


 분명하고도 똑똑하게 돌아온 답에 오히려 놀란 것은 슈였다.


 그 말과 함께 곧장 제 쪽으로 곤두박질치며 무너진 그 - 일단 카게히라라고 부르기로 했다  - 를 데리고 거처로 향했다. 원혼 치고는 무겁고 사람 치고는 가벼워서 정말로 제가 맞게 들은 것인지 끊임없이 의구심이 들었다. 상처를 씻어내고 상비약으로 치료한 뒤 붕대를 감아놓으니 그럭저럭 아까보다는 봐줄 만했다. 앳되어보이는 얼굴과 체형으로 보아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했고. 원혼도 기절을 한다는 말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아마 얼마 전까지 살아있었거나 그저 지나가던 산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꽤나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 식어버린 홍차를 뒤늦게 홀짝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누군가 톡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아… 깨어난 게냐."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이제 보니 양쪽의 색깔이 서로 달랐다. 한쪽은 노랗고 한쪽은 푸른 것이, 꼭 어렸을 때 먹었던 사탕 같기도 했다. 잠깐 말을 이해하려는 듯 이쪽을 건너다 보던 그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 말이 들리는 건가. 내 말이 들리나? 재차 물으며 답을 돌려달라는 말을 덧붙이니 한층 크게 주억거리며 제대로 들린다, 고 답했다. 그제야 슈는 한숨에 가까운 호흡을 풀어놓았다.


 또 하나의 원혼이 접수된 역사적이라면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나 슈는 정작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카게히라라고 했나. 그가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틈을 타 그의 얼굴로 흰 손이 뻗쳤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을 가릴 듯 내려온 앞머리를 거둬낸 뒤 눈 근처를 맴돌다가, 충동적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무심코 그 눈을 핥으려 들었다. 어차피 감각도 없을 것이건만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경계하는 모양새가 꼭 바깥의 사람들과 같았다.


 "…응앗?! 뭐, 뭐꼬! 갑자기!"
 "흥, 제법 예민하게 구는구나…. 뭐, 좋다. 네가 싫다면야 나도 굳이 손대지 않아. 그나저나 이제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없지 않냐만."
 "……그… 그래도."
 "너, 정말 내 말이 들리는 모양이군."


 문득 허탈한 생각이 들어 바람 새는 소리로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댈 때까지도 의구심에 찬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보이는갑제."
 "물론. …나는 묘지기니까."
 "아, 당신이 그 묘지기가. 그럼 이 넓은 묘지를 다 혼자서 관리하고 있는 기가? 안 힘드나?"
 "…별로, 원혼에게 위로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게야. 게다가 인간들에게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니 그 자들과 함께 일해봤자 필담이나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테고… 뭐, 그렇게 되었다."
 "와 사람들은 당신 말을 못 듣는데?"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이래서 가능한 한 말은 줄이려고 했건만. 그 밉살맞은 텐쇼인이 그래서 내 목소리를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슈는 짧게 탄식을 내뱉으며 새로 따른 홍차가 담긴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홍차다, 마시거라. 어쨌든 너와 같은 이들에게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지."
 "…으응… 고맙데이."
 "뜨거우니까 조심히 마시도록."


 양손으로 잔을 감싼 채 김이 올라오는 모양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 묘지기 씨 이름 물어봐도 되나?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짝이 맞지 않는 기묘한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보라색, 제비꽃의 색. 어느 지역에서는 죽음의 색으로도 통하는 빛깔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아스라이 흔들렸다.


 "…이츠키. 이츠키, 슈."


 몇 번 입 안에서 그 말을 곱씹던 카게히라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이츠키 씨라고 불러도 되제? 문득 그 눈빛이 따스하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사람과 너무 긴 시간 단절되어 지낸 탓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곳에서조차 온기를 찾고 있는 게 우스워 두어 번 고개를 내젓는 사이, 찬 바람 틈새로 이츠키 씨, 하고 불렸다. 다른 이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퍽이나 생경했다. 보통 저 뒤에는 어떤 말이 뒤따랐었는지,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왔는지.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해낼 수 있는 건 없었으나 눈앞의 이 존재가 너무도 크게 벌어져있던 제 삶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메워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산 사람에게도 걸어본 적 없는 기대였다. 그때껏 색이 다른 두 눈동자는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이가 생겼다. 노랗고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부득불 일을 도와주겠다기에, 이따금 무겁지 않은 랜턴을 들리거나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을 맡기곤 했다. 밤이면 문을 걸어잠그고 묻지도 않은 제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는 카게히라를 슈는 제지하지 않았다.

 어제는 어디까지 얘기했었제? - 마을에서 성가대원을 만났다는 데까지 이야기했다. - 아, 그랬제. 그 형, 억수로 귀엽고 예쁘게 생겼었데이. 정작 본인은 귀엽다는 말 안 좋아했었는데… 노래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다들 좋아했었다. 가끔 성가대 연습실에 내를 숨겨주기도 했었구… 한 번은 자기 성가대복도 입혀줬었는데 내한테는 좀 작더라. - 잠깐, 카게히라. - 응? 와 그러나? - 숨어살았던 건가?

 순간 그렇게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도리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아아, 응."
 "…."
 "내는 쭉 숨어살았데이. 이 눈 때문에…. 그러고 보면 이츠키 씨는 묘지기니까, 별의별 사람들 다 만나지 않나? 눈 한짝쯤 없는 사람들도 많이 오제? 내처럼 짝도 안 맞을 바에는 차라리 아예 없는 게 나을지도…"
 "이래서 속물들은, 보석의 가치조차 몰라보는군. 그들이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게야."
 "…?"
 "네 눈은 산 자들도 탐낼 만큼 아름답다. 헤매지 않고 곧바로 이쪽으로 와준 게 고마울 정도로."


 그 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않는 모습에 문득 노파심이 일어 무심코 양 어깨를 붙들었다. 일렁이는 눈이, 일렁일 리가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 안에는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리는 성미 날카로운 묘지기가. 내가 어쩌다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 철 모르고 빛나는 눈이 꼭 산 사람의 것 같아서, 슈는 도리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눈을 꾹 감은 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다가, 아주 느리게 손에서 어깨를 놓았다.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뭐꼬, 지금까지 다 들어놓고. 그게 클라이맥스인데."
 "고작 죽음을 정점이라 칭할 정도라니, 너는 대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지."
 "…."
 "네가 속에 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면, 나는 너를 올려보내야 하니까 말이다."


 내도 진혼해줄 수 있나? 차와 곁들이라고 내어준 과자를 반으로 쪼개며 지나가듯 카게히라가 물었다.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아니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지. 과자를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인 그가 큰 결심이라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카."
 "응?"
 "카게히라, 미카. 내 이름이데이."
 "이제서야 생각난 게냐."
 "원래부터 기억은 하고 있었다 안카나. 당신을 믿어도 될지 확신이 없어서 못 알려줬던 거제."
 "그럼 이제는 믿는다는 건가?"
 "…응. 신원도 확실하구, 이 근처에서 내랑 같은 사람들은 못 본 것 같으니까 그럭저럭 일도 열심히 하는 모양이구…. 믿어도, 되제?"
 "뭐, 그러거라."


 퍽 익숙하게 뻗어나간 손이 검푸른 머리칼 위를 가로지르도록 카게히라 미카는 더 이상 피하거나 움츠리지 않았다. 그 손길에서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상냥함의 흔적이라도 찾는 것인지 종래에는 쓰다듬는 손에 머리를 부벼오기도 했다. 그저 마찰열이겠지만 맞닿은 손이 조금씩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외로운 존재들끼리 연을 맺는 것도, 나름대로.


 미카가 슈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건 그 다음날부터의 일이었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종종 동네의 공동묘지를 찾았다. 동경하던 이가 잠들어있는 곳, 제 집보다도 더 편안했던 곳의 안주인이 눈을 감은 곳. 어린 마음은 상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제 힘으로 다 품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버거웠으니까. 듣기로 그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고 했었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목을 놓아 울던 아이는 어쩌면 그저 정을 붙이던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게 서글퍼서였으리라.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두 번 다시는 그 사람이 만들어준 과자를 먹으며 소꿉친구와 소리죽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이 수선해준 인형 옷을 앤틱 인형에 입힐 수 없다는 게. 언제라도 따스하던 그 사람의 시선을 다시는 받을 수 없다는 게. 그 모든 게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만큼 서러워서, 소년은 그저 묘지 주변을 맴돌았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을 닮은 인형을 보아도 그저 희미한 미소만 띄울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마음 깊숙이 새겨진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묘지 근처를 떠나지 못하는 업을 택했으니 살아있다는 의미조차 한 사람을 위해 바쳐온 것과도 같았다. 목소리를 잃었으나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어쨌든 그 사람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 이제 전할 말도 없을 듯했지만.


 "그래서 여까지 온 기가?"
 "…그래. 사실은 저기 있는 마을에서 자란 셈이니 멀리 온 것도 아니긴 하다만."
 "의외다. 이츠키 씨는 곱게 자란 도련님일 줄 알았데이. 말투도 그렇고 행색도."
 "곱게 자란 사람들은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오지 않아."
 "…역시 그렇겠제."


 눈의 색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돌을 맞기 일쑤였던 아이는 결국 눈 때문에 죽었다. 황금빛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진 이는 눈가마저 붉게 무르도록 쓰러진 자신을 붙들고 울어주었으나 한 번 꺾여버린 꽃대에 목숨은 다시 깃들지 않았다. 외로운 죽음이었다. 누구에게도 회고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막역했던 성가대원은 아이를 위해 성당에 영미사를 봉헌했고 그가 흘린 눈물은 닿는 자리마다 꽃이 되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슬픔마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그가 내려놓은 하얀 백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작 제가 그 꽃을 닮아있는 줄은 모르고. 살아서는 이유 모를 원망만 받았다 할지언정 죽어서라도 누군가의 슬픔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낯선 마을을 헤매던 도중 사는 게 퍽 쓸쓸했던 모양인 묘지기를 만난 것 또한 행운이라 여겼다. 난생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두 눈이 보석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꿈만 같았다. 허황된 욕심이라 해도 좋으니, 조금만 더 머무르고 싶었다. 이곳에, 지상에, 가능한 한 그의 곁에. 제 속에 쌓아뒀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으려던 찰나 그가 제지해준 게 차라리 고마울 정도였다.

 원혼의 이야기를 다 들으면 원칙적으로 그를 돌려보내야만 한다. 그게 바로 그 진혼이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내는 천천히 들려주께, 급할 거 없으니까… 그럼 되나? 그 말에 묘지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어 머리를 제 쪽으로 기대게끔 했다. 좀 쉬거라, 오늘은 여느 때보다도 일이 많았으니. 정작 피로가 쌓이는 건 제 몸이건만 그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게 퍽 좋아서,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쁘지 않아서 미카는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새 한밤중이 찾아왔으나 더는 두렵지 않았다.



 "묘지기 씨는 밖에서 평판이 썩 좋지는 않은갑다."


 몇 시간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만 밖에 나갔다 오기라도 한 모양인지 밤이 다 깊어서야 옷에 내려앉은 눈을 털며 들어온 미카의 한 마디였다.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치켜뜨며 바라보자 소리내어 웃으며 손을 두어 번 내젓는다.


 "아니, 요 앞에 잠깐 나갔다가 어린 아들이 하는 말을 들었데이. 다들 이 근처로는 얼씬도 말라카데."
 "그야, 산 사람이 들어와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렇지."
 "응, 그냥 그 정도로만 말했어도 좋았을걸. 보나마나 또 화냈제? 그, 누구냐… 이츠키 씨가 억수로 싫어하는, 텐 뭐라나 하는 사람 얘기할 때처럼."
 "번번이 목이 없다고 놀려대니 별 수가 없다는 게야."
 "으응~ 그것도 꽤 힘들겠네."


 당신은 목이 필요하구, 내는 목 위로는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 둘이 바꾸면 딱 맞지 않겠나? 돌아온 것은 허튼 소리 말라는 불호령이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이 기묘한 묘지기에게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할 나위 없는 극찬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제게 그런 수식어를 붙이고 나서부터 오히려 제가 다 의기양양했던 것을, 진즉 알아챘어야 했는데. 창가에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앉아서 밖을 내다보던 미카가 탄식에 가깝게 그를 불렀다.


 "이츠키 씨, 밖에 눈 온다."
 "또 쌓이려나보군."
 "와 그래 회의적이가? 좀 내다봐라, 예쁘지 않나?"
 "…흥, 머지않아 성탄이니까 말이다…. 눈요깃거리로는 봐줄 만하겠구나."
 "있제, 내는 눈이 오는 날 태어났데이."
 "네 힘으로 기억해낸 게야, 아니면 이번에도 여태껏 나를 믿지 못해서 이제서야 말해주는 게야."


 이번에는 내를 믿지 못했던 기다. 아직 난로를 틀지 않아 차가운 공기 중으로 새하얀 입김이 퍼졌다. 내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구도 말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담담해서 더 에는 듯한 말씨였다. 머리 위로 익숙한 손이 얹혔다. 눈을 들어 손의 주인을 좇던 미카가 익숙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아름답다고 해준 눈이었다. 더는 못 견디게 싫어하면서도 반사적으로 가릴 필요가 없다. 눈웃음 위로 슈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럼 이제부터 너는 눈 오는 날 태어난 것으로 하자꾸나."
 "응…?"
 "너는 눈이 내리는 날 이 세상에 온 거다, 카게히라."
 "그럼 눈만 오면 다 내 생일인 기가?"
 "글쎄, 그렇다고 할까."


 마주한 자수정이 애틋하게 휘어졌다. 더는 감정도 눈물도 없다 일컬어지던 무정한 묘지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가장 투명한 너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언젠가 계절이 바뀔 즈음에는 가장 큰 선물이 될 이별을 - 아직은 차마 예쁘게 포장해 내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창 밖으로는 처음 만나던 날처럼 눈이 쌓이고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다른 날이라 해도 축하해주마. 언젠가 읽었던 동화에 나왔던 구절을 되새기며 몇 번이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빠짐없이 그 아이의 생일인 것만 같았다. 그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렇게 회고했다. 그 아이가 딛는 길목마다 별이 떨어지는 듯했다. 망자의 이름을 달고도 저토록 반짝일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겨울이었고, 눈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내렸다. 진눈깨비처럼 잠깐 흩날리다 말 때도, 비석을 새하얗게 덮을 만큼 소복이 올 때도 있었으나 미카의 눈에는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생일 축하한다. 그런 날이면 빼놓지 않고 건네던 인사도 어느새 처마 위에 쌓인 눈만큼이나 제법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무렵 퍽 긴 시간 동안 쌓여있던 눈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쏟아져내렸다.


 그러는 새 작은 묘지기의 집에도 첫눈보다 달갑지 않은 성탄이 찾아왔다. 마을에서 주워온 전나무 가지며 사철나무의 열매를 벽 곳곳에 장식해두는 미카의 뒷모습이 분주했다. 제 몫으로 내려둔 차가 다 식는 줄도 모르고 장식을 마친 그가 경쾌하게 슈를 부르며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이츠키 씨, 내 다 꾸몄다."
 "뭘 부산스럽게…. 뭐,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구나."
 "에헤헤, 이래 해놓으면 아들도 겁 모르고 달려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루만이니까 이해해도."
 "이러나저러나 오늘은 둘만일 테다. 그나저나 차가 다 식어버렸다는 게야."
 "으응… 글네."


 그럼, 차 다시 끓여오는 동안 내 얘기 좀 들어줄 수 있나?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대던 미카가 예의 얼굴로 웃었다.



 그해 성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많이 내렸다. 밤이면 랜턴을 들고 순찰을 도는 묘지기를 따라나서던 소년이 좋아할 법한 날씨였다. 작은 집은 언제 잠시나마 불이 밝혀졌었냐는 듯 금세 조용해졌고, 마을의 누구도 깊이 마음 쓰지 않았을 성탄절의 이야기는 그저 그런 옛날 이야기처럼 잊혀갔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마지막 인사처럼, 일 년만 지나면 다시 돌아올 생일을 더는 손꼽아 기다리지 않듯 묘지기의 기억도 차츰 희미해졌을 테다. 안녕히, 나의 카게히라. 어느 겨울날 발견한, 말갛게 빛나는 사람에게 건넸던 작별인사처럼. 밤마다 불을 밝혀왔던 랜턴으로는 이제 성에 차지 않을 만큼 환한 빛을 가지고 온 어떤 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어김없이 밤이 깊었다. 하얗게 쌓인 눈이 다만 따스하게 감싸안은 집 위로 조용히 별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이곳에는 피어나지 않는 봄의 꽃을 닮은 머리칼과, 누군가를 향해 단 한 번이나마 마음을 다해 웃어주었던 기억을 아스라이 간직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묘지기는 오늘도 랜턴을 챙겨들었다. 몇 년 남짓의 시간조차 빗겨간 얼굴이었다.

 이츠키 씨, 밖에 추우니까 옷 단단히 입고 나갔다 와라. 아, 같이 갈까? 내도 가도 되제? 지금도 종종 선명하게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속을 것을 알고도 뒤를 돌아보면, 얼핏 색채가 없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숨쉬는 백합 두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떠난 이들을 위한 꽃, 돌아오지 않을 자들을 위한 비가였다. 그 아이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받았던 꽃이라고도 했었다. 다녀오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을 꽃 앞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든 곳에는,

 
 "…내 너무 늦었제, 이츠키 씨."


 그리웠던, 어쩌면 잊고 있었을 서로 다른 색의 두 눈동자를 빛내는 기억 속의 사람이.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 천사를 닮았다는 어느 금발의 소년처럼, 눈에 담기에도 벅찬 모습으로, 그때처럼 자신의 앞에 서있었다. 머쓱한 듯 웃는 얼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길다면 긴 시간을, 오히려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슈는 랜턴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숨을 고르며,


 "늦었구나, 카게히라."


 그때처럼 마음을 다해 웃어보였다. 비로소, 생일이 아닌 날의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