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인간의 사랑법
Rachieh
2017. 12. 10. 12:19
#슈미카_전력
18차 전력 주제 : 성장
* http://sonatapourdeux.tistory.com/80 (인형의 시간)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링크 누르시면 이동합니다.
나는 줄곧 진열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구체관절인형이었는지 테디베어였는지, 아예 인형이 아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데려가주기를 기다리면서 옆자리가 점점 비어가는 걸 느꼈지. 불안했지만 참을 만은 했어. 무서웠지만 버틸 만했을 거야, 아마도.
그리고 마침내 진열장에 혼자 남았을 때, 그때는 조금 울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떻게 되는 걸까….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두려웠거든.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아마도 평범한 인형이었을 나에게,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움직이지도 못했을 나에게. 하지만 나는 거짓말처럼 손을 뻗어서 그 손을 맞잡았고… 그 순간 깨달아버린 거야. 나는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걸.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던 보라색 눈동자를 기억해.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부드럽게 휘어질 때만큼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 같던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어. 잊지 않고 있었어. 그때껏 한 번도 정성스레 불려본 적 없는 내 이름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되뇌듯 불러준 그 목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었어. 숱한 시간을 돌아, 수없는 상처를 딛고 마침내 당신과 약속했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도. 깍지 낀 손 위에 입을 맞추며 두 번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하얀 얼굴을 적시는 눈물 몇 방울과 함께 행복을 약조하며 당신이 웃어주었을 때도.
그 모든 것을 나는.
충격 그 자체라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잠이 덜 깨었나 싶어 두어 번 손을 들어 눈을 비볐으나 눈앞의 풍경은 도리어 선명해질 따름이었다. 산산조각난 유리장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망가진 옛 인형.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고는, 어설프게 웃으며 이제 일어났느냐고 묻는 연인. 이 모든 것들이 제 눈보다도 균형이 맞지 않는 것만 같아서, 미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스승님, 별로 안 좋은 아침 같데이?"
혹시라도 앞에 있는 이가 제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까봐,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잔뜩 떨려 제 것 같지가 않았다. 씁쓸하게 웃어보이고는 급히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고 물기를 닦아낸 그가 이쪽으로 걸어와 저를 꼭 안을 때까지도, 아예 의심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끌어안은 팔에는 여느 때보다도 힘이 실려있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그의 어깨 위에 턱을 내렸다.
"참말로 괘안나? 좋은 아침 맞는 기가?"
"…카게히라."
"응. 내 여기 있데이."
"……카게히라."
"내 여기 있대도? 스승님 아침부터 이상하다…. 손에서 피 나던데 그냥 냅둬도 되나?"
걱정스레 저를 올려다보는 색이 다른 두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별 것 아니라고 잡아떼어도 봤으나 부득부득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는 통에, 어설프게 반창고를 감는 모양새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 됐데이. 손을 뗀 미카는 아주 오랫동안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바라봤다. 살짝씩 움직이는 입술이 예전에 인형을 불렀던 이름을 말한 것만 같았다.
"…스승님이, 그런 기제?"
"그래. …내가, 부쉈다. 내가 끝냈어."
"와 그랬나."
"왜 말해주지 않았지, 카게히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들기에 짐짓 고개를 내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도 안되는 대화를 내 힘으로 기억해내지 못했더라면 너를 다시 보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손길이 차츰 느려졌다.
자랐다. 정확히는, 자라버렸다. 이제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가 살던 유리장은 부숴버린 지 오래다. 너무 과하게 숨을 들이마신 나머지 허파가 아팠지만 이조차 없다면 죽어버리고 말리라. 다들 그렇게 자라는 거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었다. 시간을 멈춰봤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멈춘다고 멈춰지는 것이던가. 결국은, 그 아이의 앞에서 조금 울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창 밖으로 가늘게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미카가 말했다. 고맙다고. 그제야 겨우 내쉬는 숨이 편했다. 사실은 그 모든 게 두려웠다고 말하며 웃는 보라색 눈동자가 서글펐다.
나는 줄곧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실은 당신을 만난 뒤로도, 계속 기다려왔어. 꿈에서 깨어나보니 아플 만큼 생생한 그가 그곳에 있었다. 그의 손 끝에서 찬찬히 되짚이는 제 몸 곳곳을 바라보던 미카가 탄식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열장에서 스승님을 기다리는 꿈을 꿨데이. 나를 기다리는 것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노랗고 푸른 눈을 휘며 그가 좋아하는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안카나.
내는 줄곧 그랬으니까.
실이 아닌 마음이 움직였다. 애초부터 살아숨쉬고 있던 미카를 움직이게 한 것은 날카로운 금색 실이 아니라 계속 기다려온 단 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제 것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속도로 뛰고 있는. 체온과 가장 흡사한, 몸 안에 든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뜨거운 그것은 완벽을 기하던 슈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협잡물이었으리라. 작은 충격에도 이토록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해 빠르게 뛰어버리기 일쑤였으니. 허나 그도 결국은 사람이었던 것을, 인간이 되기 위해 처절할 만큼 고동하는 심장까지도 멈출 힘까지는 없었다. 온정을 갈구한 끝에, 성장을 향한 피나는 노력을 멈추지 않은 끝에 비로소 찾아낸 하나뿐인 보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계속 어여쁘라고,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가능한 한 영원히, 내 세계가 막을 내린 뒤에도. 달이 지고 별이 떨어지더라도, 변치 말고. 흐르는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너조차 인형처럼 박제해두고 싶었던 나날의 이야기였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의 온기와 허술하기에 사랑스러운 일상이었던 것을. 누구의 시간을 갈구했는지 기억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모래처럼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버릴지 모른다.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빼앗았는지, 무엇을 되찾고 싶었는지. 잔해처럼 남은 흔적 속에서 건져올린 브로치를 미카는 소중히 제 방으로 들고 갔다. 사람이 차기에는 사이즈가 지나치게 작았으니 아마 인형에라도 달아줄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인형의 시간을 맞았다. 오랜 인형이 앉아있었던 자리에는 브로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손도끼를 쥐었던 감각조차 이제는 생경했다. 밤이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박동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푸르게 내려앉은 밤을 덧칠하는 호흡 위로 산 사람의 흔적이 하나둘씩 쌓였다. 모두, 부서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들이었다. 부숴야만 되찾을 수 있는 게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멈춰둔 시간은 부식되는 수밖에 없는 줄도 모르고. 얼핏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으나 니토는 제법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식사 약속을 깬 건 이쪽이었으니 이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무엇을."
"그 아이는 처음부터 인형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멈춰두려고 해도 자꾸만 앞으로 가고, 붙들어두려고 해도 자라고… 그런, 사람이었던 거지. 사실은 전부터 이 얘기 해주고 싶었는데."
"너는 그렇게 생각했군."
"응. 지금의 발키리는 너무 둘만의 세계라서 외부인인 내가 끼어드는 것도 주제넘어보일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아무튼 미카 칭은 처음부터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아이에게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인형의 기준을 적용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일이고."
"…."
"하지만 이츠키도 결국에는 그래서 미카 칭을 사랑하게 된 거 아니야?"
일순 붉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슈를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인간의 사랑법에는 영 서툴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살아서는 맞추지 못할 인형의 틀에 자꾸만 끼워넣으려 들고, 결국에는 자신조차 그 안에 얽매여 움직이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결국 미카가 정말로 인형처럼 변해버렸을 때는 세상이 발 밑으로 무너져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암흑.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에는 너조차 없었을 것이기에 그렇게 울었으리라고, 슈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사람이 되어 사람을 끌어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소중한 만큼만 곁을 내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다른 소중한 걸 몇 번이고 내버리는 한이 있다 해도.
그 아이는 줄곧 자신을 기다려왔다고 했었다. 우연찮고 별 볼 일 없었을 처음의 인상은 아마도 이날 이때까지 미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을 테다. 진열장에서, 제 등 뒤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무대에서… 기약없이 계속되어온 기다림의 시간이 인형이라도 마모될 정도로 새하얗게 쌓여가도록 변치 않고 빛나온 것은 역시 그 또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나. 있제, 스승님이 내를 데리러 와주는 꿈을 꿨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한 꿈의 한가운데에 그 아이는 어김없이 자신을 올려놓으려 들었다. 그 꿈은 이미 색도 다른 두 눈동자에 깊숙이 아로새겨져 다른 누구도 아닌 그만의 것이었는데도. 그 이마에 가만히 입술을 내렸다.
그래서, 기뻤나? - 다른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뻤데이. - 너는 또 진열장에 있었고? - 응. 스승님이 좀만 늦었어도 내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렸을 기다. - 나는 늦지 않는다는 게야, 카게히라. - …응. 하긴 스승님은 늦게 오고 그럴 사람이 아이제.
그래도, 맹세코 두 번 다시는 늦지 않아. 사람은 마모되지 않는 대신 돌이키지 못할 상처를 입어버리니까. 뒷말은 입 안으로 삼킨 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옛 동료의 말이 옳았다. 결국에는 사람의 온기를 간직하고도 그걸 향해 손을 뻗던 이 아이가 그리도 사랑스러웠던 것을. 그 마음이 소중해서, 그 온기가 절절해서 그렇게 서둘러 자라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두 번 다시 인형사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그저 행복할 것 같았다. 설령 이제 남은 것이 속수무책으로 자라는 것뿐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네가 있지 않느냐고. 그날 부순 것은 제 인형의 집이 아니라 미카가 살아온 진열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나에게 이런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가. 소리죽여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답은 받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잘했다는 칭찬이든, 성급했다는 원망이든. 어쨌든 이제는 전부 곁에서 들려줄 이의 시간으로 화했으니, 더는 어설프지 않은 애정을 구사할 날도 틀림없이 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이제 변명 같은 건 꿈에도 생각지 말자고.
창 밖으로는 어느새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에도 바라 마지않던 이와 함께 눈에 담는 것만으로 축복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줄곧 너를 찾고 있었으니까. 언제든, 또 어디에서든 넘어진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선물한 너를. 사람답게,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줄 유일한 사람이 나였을 너를. 언젠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지막까지 함께하자 약조하게 될 너를.
비로소 온전히 끌어안게 된 그 모든 것을 이제는 사랑스럽다고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