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Season of the Anthem
Rachieh
2017. 9. 30. 15:09
#슈미카_전력
13차 전력 주제 : 동경
1
이것은 찬가(讚歌)가 아닌 비가(悲歌)이다.
2
스승님, 그 얘기 들었나? 여느 때의 조용한 수예부실을 깨우는 것은 어김없는 미카의 목소리였다. 슈는 자수를 두느라 바삐 놀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푸른 색의 두 눈동자가 안타까운 듯 절박하게, 묘한 느낌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재빨리 답을 돌려주었다.
아까 반에서 들었는디, 윽수로 큰 장난감 프랜차이즈 있잖나. 문을 닫는다카더라. 그 왜, 전에 스승님이랑도 같이 간 적 있었데이. 기억할라나 모르겠네…. 아무튼, 내는 아쉬웠다. 재밌는 것들 많았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도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보아 퍽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머리 위로 와닿는 익숙한 체온에 눈매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내려온 미카가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아쉬운 눈치구나, 카게히라.”
“으응…. 아무래도 글체.”
슈는 그때껏 자신과 함께 간 적이 있었다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제가 이 아이와? 가끔 좋아하는 인형을 사주기 위해 장난감 가게에 들르긴 했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원단을 고르러 다닌 횟수가 좀 더 많았다. 적어도 미카와 함께 보낸 시간 중에서는. 폐점 사실에 이렇게까지 아쉬워할 것을 알았더라면 두어 번쯤 더 함께 갈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파하고 다른 완구점에라도 들러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얼마 전에 세나에게서 제안 받은 무대의 컨셉이 떠올랐다.
카사 군, 아니, 우리 유닛에 있는 1학년이 무대 전단지를 갖고 왔는데 보니까 컨셉이 장난감인 거야. 의욕이 앞서는 건 좋지만 알다시피 우린 그런 쪽이랑은 잘 안 맞잖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발키리는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런 건 너네 전문 아니야? 지나가듯 건네받은 한 마디에 문득 일전의 지하 라이브를 마치고 환히 웃으며 무대를 내려오던 미카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면 장난감이며 인형 같은 걸 퍽 좋아했었지. 미카를 위해 선뜻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공연이라면 즐겁게 준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게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게히라, 오늘 방과후에 시간을 낼 수 있겠느냐.”
“응아? 응. 내 오늘은 알바도 없구….”
“잘됐구나. 새로운 무대를 준비해보자는 게야.”
앞뒤 맥락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뚝 떨어진 말이었으나 무대라는 말만큼은 제대로 전해졌는지 미카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3
미카에게는 낯설기만 한 골목길을 슈는 망설임 없이 척척 걸어나갔다. 어느새 꽤나 깊숙이 들어온 탓에 해도 잘 들지 않는 좁은 길은 퍽 어두웠다. 갑자기 그림자가 길어지자 화들짝 놀라며 제게 바짝 붙어서는 미카를 슈는 부러 제지하지 않았다. 누가 보면 내가 널 못 들어올 곳에라도 데려가는 줄 알겠구나. 다 왔다는 게야. 그제야 고개를 든 미카는 지금껏 그때 본 풍경을 마치 꿈 같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앤티크한 분위기의 소품샵이었다. 슈가 조심히 문을 밀어 열자 풍경이 흔들리며 고운 소리로 울었다. 먼지 한 점 없이 깨끗이 청소된 유리케이스 안에는 구체관절인형들이 줄지어 앉아있었고 자그만 스노우볼과 오르골이 가지런히 열을 맞춰 놓여있다. 티컵과 찻주전자도 눈에 띄었다. 세월을 탄 흔적은 있으나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반짝이는 물건들이었다. 어떻게 발견했는지 가게 한구석에 쌓여있던 봉제인형에 눈을 빼앗긴 미카만큼이나, 슈도 어쩐지 옛 추억에 잠긴 것만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 근데 여긴 와 온 기가…? 소리 죽여 가게 안을 한 바퀴 빙 돌고 온 미카가 그때껏 같은 자리에 붙박인 듯 서있는 슈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군. 무대 소품으로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들러봤다. 그러고 보니 너는 처음 와보겠구나.”
“응…. 윽수로 신기한 가게 같데이. 오래된 것들도 많구. 근데 우리 무대 어떤 스타일로 할 건지 아직 말 안 해줬다 아이가?”
“장난감을 모티브로 할 예정이다. 세나… 같은 반 녀석에게 제안을 받아서 말이지.”
근데 이런 골동품점을 왔나? 의아한 듯 올려다보기에 조금 웃으며 시야를 같게 했다. 누구나 마음 속에 희미한 동경 하나쯤은 있는 것 아니겠느냐, 카게히라. 잠깐 이해하지 못한 듯 미간을 설핏 좁히던 미카가 이내 예의 웃음으로 답했다.
“응, 역시 그렇겠제….”
“너와 꼭 한 번은 이곳에 오고 싶었다.”
“내랑?”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세계라도 헤매는 듯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색이 서로 다른 한 쌍의 수정과 맞부딪히며 웃었다. 어떤 일로 울었든, 어떤 일로 누구와 다퉜든 이곳에만 오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곳곳에 자리해있었다. 다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신기루처럼.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 추억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더 아름다운 현실이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만으로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곳이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입자 하나까지도, 모두 그대로라는 게 느껴졌다. 문득 방에 놓아두고 나온 인형의 보석 안구를 떠올렸다. 동경했던, 동경하는. 뒷말에 이은 것은 미카를 향한 시선이었다.
“그래, 어렸을 때 자주 왔던 곳이기도 하고 말이지. 너도 좋아할 것 같았다만.”
“내는 맘에 든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거든 몇 개 골라보거라. 여기까지 나왔으니 기념으로 사주겠다는 게야.”
“엣, 참말이가?”
그라모 내는 이기랑, 아, 저 오르골도…. 갑자기 손이 바빠지는 모양새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천천히 골라도 된다며 저지하자 그제야 진정하는 미카에게, 제가 다 숨을 고른 뒤에야 운을 떼었다.
“그 전에, 네가 꿈꿨던 것을 들려다오.”
그 언젠가, 기억 속의 소중한 사람이 저에게 물어봐주었듯. 등 뒤로 인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몇 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그녀는, 소년의 하나뿐인 태양이었다. 소꿉친구와 손을 맞잡고 그녀의 등을 따라 걷다 보면 항상 이 가게가 나왔었다. 작은 오르골과 스노우볼이 있고, 수십 개의 보석 안구가 따스하게 내려다보는 앤틱샵.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녀는 늘 이렇게 묻곤 했다.
슈 군이 꿈꾸는 걸 들려주겠니?
잇쨩은 바느질을 잘 해요! 아, 그리고 인형 옷도 무지 잘 만들고요…. 옆에서 몇 마디씩 거드는 친우의 말에 머뭇대다가도 결국에는 소원을, 꿈을 이야기했던 자신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저는,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유리창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햇살 아래서, 더없이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던 세계는 지금껏 빛바래지 않은 채 단단히 저를 지탱해주고 있기에. 그리고 그 세계가 빛을 잃지 않도록 지켜준 광원이 지금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허리를 살짝 굽히고 눈을 맞추자 시야가 같아진 게 기쁜지 어설프게 웃어보인다. 머리 위로 가볍게 얹히는 손의 무게에, 잠깐 망설이던 미카가 이내 말문을 떼었다.
“내는….”
“….”
“내는, 노래가 하고 싶었다. 어릴 때도… 지금도.”
소중한 이의 얼굴 위로 환하게 새겨지는 미소는 또 다른 햇살이 되고 그가 말해준 오랜 동경은 거짓말처럼 보라색 눈동자도 웃음짓게 만들었다. 슈는 그제야 만족한 눈치로 미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의아한 듯 따라붙던 시선이 차츰 누그러졌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와 묻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야. 이제부터라도 더 많이… 자주, 같이 노래하자꾸나. 카게히라.”
“응, 내는 좋다!”
그라모 내 인자 사고 싶은 것들 마저 골라도 되나? 뒤를 돌기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동경, 그것을 끄집어내어 아름답게 색을 입힐 생각이었다. 카게히라의 마음 속에도, 그리고 제 마음 속에도. 그 무대를 보러 올 관객들의 안에도 분명 잠들어있을, 한때는 누군가의 모든 것이었을.
여전히 잠들지 못한 환상을 위한 마지막 찬사를.
4
그라모 여기다가는 녹슨 태엽을 두고, 여기는 인형을 쌓아두고… 아, 스승님. 내 방에 있는 토끼 인형 갖고 와도 되나? 무대의 콘티를 짜느라 손이며 입이 분주히 움직이던 미카가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가지고 오는 건 네 마음이다만, 먼지가 앉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으응… 그런 건 괘안타.”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쁜 얼굴로 스케치의 한 구석에 토끼 모양을 그려넣는 걸 잠자코 바라보다가 무심코 웃음이 터져버렸다. 저를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심취한 미카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 것도 큰 실례가 될 것 같았기에 슈는 꽤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제가 무대를 구상할 때보다는 퍽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미카의 손에서 완성된 콘티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슈가 콘티를 점검하는 동안 미카는 일전에 샀던 오르골의 태엽을 감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장난감들의 환상, 더는 누구도 찾지 않는 병정 인형이 꾸는 꿈. 이번에 두 사람이 꾸미게 될 무대의 컨셉이었다. 한때는 아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을 화려한 유원지에는 하얗게 먼지가 쌓였고,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꼬마자동차며 오르골의 태엽은 녹이 슬어버린 지 오래다. 어쩌면 폐허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곳에,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인형들이 나타난다. 허파가 아닌 등에 달린 태엽으로 숨을 쉬는, 멈춰버린 흑백의 세계에서 여전히 색채를 간직하고 있는.
미카는 의외로 무대의 플롯을 제법 쉽게 받아들였다. 그토록 아쉬워하던 완구점의 몰락을 위한 애도의 의미로 여겼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을 빛내며 열정적으로 뛰어들기에 선뜻 무대구상까지 맡긴 참이었다. 슈로서도 의도했던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칠 줄 모르고 반짝이는 두 눈에 또 다른 추억을 새길 수 있을 테니. 곧 있으면 시작될 무대를 그 아이와 자신을 위한, 혹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한 서사시로 만들리라. 틀림없이 언젠가는 이 또한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다. 이 순간을 눈에 새긴 또 다른 이의 손에 의해서.
막이 오르기 직전, 암전된 객석을 눈앞에 그리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녹이 슨 태엽 대신 피가 도는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5
이것은 비가(悲歌)가 아닌 찬가(讚歌)이다.
무대를 마친 뒤 며칠간은 한가하게 지낼 수 있었다. 츠키나가와 함께 공연을 관람하러 온 세나는 과연 해낼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고, 그 옆에 있던 츠키나가는 드물게 순수한 호평을 돌려주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미카는 이따금 장난감 체인점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긴 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공연 이후에 슈와 함께 시내로 인형을 사러 나갔다 온 참이기도 했거니와, 가끔 반 아이들과 인형뽑기도 하는 모양이었으니.
앤틱샵에서 사온 스노우볼의 발레리나가 턴을 하는 모양새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미카가 스승님, 하고 불렀다. 새로운 의상의 도안을 그리고 있던 슈가 눈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스승님의 꿈은 뭐였나?”
대뜸 물어오는 통에 잠깐 말을 잃었다. 평소답지 않게 곧바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슈를 미카는 꽤 오랫동안 기다려주었다. 익숙하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나는 무대를 꾸미고 싶었다는 게야.”
“참말이가? 그라모 얼른 다음 무대를….”
“그리고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 카게히라.”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으로 가을의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스노우볼의 겉면이 영롱한 색채로 빛났다. 잘은 몰라도, 스승님이 꿈을 이뤘으면 잘된 거겠제…? 쓰다듬어오는 손에 머리를 부비며 슈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던 미카가, 이 순간에도 분명 새로운 꿈을 꾸고 있을 아이가 말했다. 이제는 너의 꿈이 곧 나의 그것이 되리라고, 네가 그리는 세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슈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비로소 동경의 계절이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기쁜 듯이 휘어졌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