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Purgatory

Rachieh 2017. 9. 10. 11:59

#슈미카_전력

12차 전력 주제 : 여행

 

* 사망소재 주의

 

 

 아주 긴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오는 길이라는 게 있다면.

 짐을 꾸리는 도중에 니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남는 손이 없었으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 도구를 대충 부려놓은 뒤 끊어지기 전에 휴대폰을 귀에 갖다대었다. 오히려 이쪽보다도 더 긴장한 것 같은 상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언제나처럼 저보다도 그 아이 - 미카를 먼저 걱정하는 니토에게 카게히라는 무사하니 염려 말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식은땀이 흘렀고 휴대폰을 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뒤에서 미카가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리라.


 "…스승님."
 "짐은 다 챙긴 건가."
 "…응… 알잖나, 내는 뭐 많이 필요하지도 않데이."
 "빠트린 건 없는지, 잘 점검하라는 게야.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테니."
 "……."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제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며 조금은 슬픈 눈으로 올려다본다. 아니, 그때 이미 울고 있었을까. 누구로부터 온 전화였냐고 묻기에 니토, 라고 짧게 답했다. 뭔가를 물으려는 듯 잠깐 달싹이던 입술이 이내 잠잠해지더니, 사악 호선을 그리며 달콤한 말을 건네왔다.


 "슬슬 출발해야제, 스승님."


 쫓기듯이 오르는 여행길이었다. 여행이라고 부르기에도 한없이 애매하고 처량한, 차라리 유배라고 이름 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둘만의 길이다. 저만 가도 된다고 했거늘 기어이 따라오겠다며 몇 날 며칠을 울며 지샌 미카였다. 슈로서도 혼잣몸으로는 단 하루도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마지못한 듯 허락을 내리긴 했으나 여전히 제가 이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로 카게히라를, 저의 사랑스러운 연인을 지옥 끝까지 몰아세우려 하는가. 아니, 정말로 끝이라는 게 있다면 그곳에는 내가 서있을 테니 적어도 최악의 결말만은 막아줄 수 있으리라.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말 괜찮겠느냐."
 "…뭐가?"
 "너는 여기 남아도 된다는 게야. 이제는 혼자서 활동해도 된다."
 "…."
 "기자회견이라도 열거라. 이제는 발키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나와도 모든 연을 끊었다고."
 "그럴 수는 없제, 내도 발키리 아이가."
 "…."
 "발키리는 지옥 끝까지 함께, 잊어뿟나?"


 티없이 말간 얼굴로 그리 말한다. 울컥 치받는 감정에 미카를 끌어안자 그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종래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시야를 같게 한 미카가, 손을 뻗어 느리게 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있는 힘을 다해 웃어보였다. 살고 싶다, 카게히라. 살게 해다오…. 끝끝내 안에 든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토해내버리는 연인의 앞에서 미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었다. 삶의 끝이 아닌 끝에서, 사지 멀쩡한 채로 맞이할 죽음의 앞에서.


 "응, 살자. 스승님."
 "…."
 "내도 살고 싶다. 스승님이랑 같이."
 "…."
 "그니께, 가자."


 살기 위해서 떠난다. 살고 싶었기에 떠나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 숨과도 같았던 무대를, 예술을 손에서 놓아야만 한다니. 그런 식으로 이어가는 목숨은 그 얼마나 부질 없고 속물적인 것이던가. 홀연히 사라져버릴까 마음먹었던 시절, 밤에 문득 눈을 떠보면 늘 옆에는 미카가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었다. 이따금 제 품에 안긴 채로. 그 모양새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또 소중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예술가 이츠키 슈가 아니더라도, 카게히라 미카의 연인인 이츠키 슈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아질 것 같아서,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함께 도망치기로 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고른, 최후이자 최선의 도피처였다. 그러니까 그때로서는.


 차를 운전하는 내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러 라디오는 틀지 않았다. 날개 꺾인 예술가, 절정에서 추락한 아이돌 유닛, 따위의 평은 이제 신물이 나버린 탓이다. 그런 걸 들어봤자 옆에 있는 미카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던 것도 있다. 어찌 되었든 지난 몇 년간 숱하게 무대를 함께해온 아이였다. 같은 유닛의 멤버로서, 또 어떤 의미의 최측근으로서. 잘은 모르지만 너와 나를 이어주고 있는 붉은 실이 꽤나 튼튼했던 모양이라고, 슈는 미카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흘긋 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곳까지 함께 떠밀려온 것일까.

 부러 인적이 드문 별장을 골랐다. 원래부터라도 사람이 많은 곳은 영 내키지 않았을 뿐더러, 이곳이라면 저희를 폄훼하는 이들은커녕 알아보는 사람들도 없을 것 같았기에. 짐을 대충 부려놓은 슈가 캐리어에서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허리를 넘는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따스한 인상의 앤틱 인형이었다. 이제는 그저 평범한 인형에 지나지 않지만,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거니와. 책상에 앉은 먼지를 떨어내고 그 위에 조심히 올려두었다. 때마침 미카가 까치발을 들고 방으로 찾아왔다.


 "굳이 소리 죽여 다닐 필요는 없다는 게야. 너와 나를 제외하면 사람도 없지 않느냐."
 "…그래도, 스승님 집중하는 것 같아가."
 "이제 집중할 일도 다 끝났다. 너에게만 집중하면 되겠구나."


 평소답지 않은 어휘 선택에 난처한 듯 눈을 굴리던 미카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라모, 인자 내한테 집중해줄 기가? 꽤나 본격적으로 침대에 걸터앉기에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자리를 잡자 불쑥 입을 맞춰온다. 손을 감싸는 체온이 따스했다. 정말로 이 모든 게 이대로 멈췄으면, 그렇게 바라면서도 눈앞의 사람을 사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밤은 긴 만큼 서글펐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도록 서로를 안은 뒤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꿈도 어둠도 찾아오지 않는 밤이었고, 그 끝에 찾아온 아침은 함께 보낸 밤보다도 더한 칠흑에 휩싸여있었기에 슈는 차라리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껏 미카는 제 품에서 편히 잠들어있었다.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그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살게 해달라는 부탁은 애초에 무의미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실을 쥐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였으니.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닥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적어도 학교라는 울타리가 있었던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추락이었고, 결국 그때보다도 더한 절망을 맛봐야만 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게, 한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는다는 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소문은 결국 실체를 잡아먹어버렸다.

 정말로 여기가 지옥이라는 곳인가. 스스로에게 물을 때마다 답을 돌려주는 것은 한결같이 곁을 지켜온 그 아이였다. 어쨌든 그 끝까지도 따라오겠다 맹세했던 이 아이가 함께 있으니, 이곳이 그 지옥인가 보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작게 오르내리는 마른 몸을 바라보다가, 목울대 근처로 뻗치려던 손을 멈췄다. 잠시나마 그의 숨을 끊고 저도 함께 죽을 마음을 먹었었다. 미친 짓임을 깨닫고 잠든 미카의 곁에서 입을 틀어막은 채 그가 깨어날 때까지 울었다. 미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던 저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으리라.

 아니, 애초에 살아있는 것은 맞았던가. 좋은 아침, 이라며 살갑게 인사하는 미카를 끌어안고 몇 번씩 등을 쓸어내렸다. 마주한 두 개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 울림은 적어도 제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아서,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올릴 힘을 주었다. 언젠가의 무대 장식에 쓰였던 거대한 기계 심장과는 다르다. 온기가 있고, 온전히 제 힘으로 뛰고 있는. 비록 빛은 바랬으나 여전히 따스한.


 "스승님, 산책이라도 나갈까…?"


 마주치며 웃는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별장 근처에 있는 산책로를 걷는 동안 미카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재잘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슈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천천히 입을 뗐다.


 "돌아가도, 괜찮다는 게야."
 "…."
 "무대에 서는 것, 노래 부르는 것… 모두 네가 좋아하던 것들 아니었느냐."
 "그것들을 위해서 스승님을 포기해야 한다면 내는 그걸 포기할 기다."
 "카게히라."
 "어차피 이제 내가 설 자리도 없을 거구…."


 사람들은 내를 스승님만큼 사랑해주지 못하잖나. 깔끔하게 내려버린 결론에 슈는 결국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남는 손을 들어 미카의 뺨을 쓰다듬다가 그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산책로 한가운데에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 천천히 숨을 멈춰가면서. 얼굴을 적시는 따스한 빗물이 누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날 슈는 무대의 도안을 그렸다. 까마귀의 깃털과 부서진 왕관의 파편이 나뒹구는 무대 뒤쪽으로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녹슨 기계장치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움직인다. 곡조가 클라이맥스에 달할 즈음, 기계가 토해내는 신음조차 더는 들리지 않고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멈춘다. 하다 못해 끊어진 음악의 잔향조차 없이,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버린다. 마침내 기계로 된 무결한 심장이 정지한다. 돌아보는 이의 눈에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미카에게 그걸 마지막 선물로 주려다 말았다. 더는 무대에 서달라고 말하지 않는 대신 미카는 매일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시절, 제가 없었던 삼 학년 때, 그 밖에도 나란히 프로 데뷔를 해 줄곧 같은 무대에 오르던 나날의. 이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그 시절은 분명 행복했었다. 이 아이와 함께 보낸 청춘은 분명 그 무엇보다도 눈부시게 빛났었다고. 집 안이 적막해서 공연히 틀어둔 라디오는 그새 미카가 손이라도 댔는지 이제는 어디에서도 들려올 리 없는 지난날의 저희들이 부른 노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곳을 연옥이라고 부르자. 천국과 지옥, 발할라와 니플헤임 사이의 그 어딘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로운 영혼들이 떠도는 곳. 우리는 새벽을 맞지 못하고 죽어갈 여행자. 미카가 근처 꽃집에서 사다 꽂아두었던 꽃이 그새 시들어버렸다. 여느 때 같았더라면 아쉬워하며 곧장 다른 꽃을 고르러 가자고 했을 아이가 어쩐 일로 잠잠하다. 저의 목에 입술을 묻어오는 미카를 힘껏 끌어안고,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결속을 확실하게 했다. 카게히라, 미카, 미카…. 천국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할지언정,

 …스승님.

 적어도 그 입으로 불릴 수 있어서 잠깐이나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마드모아젤. 마지막으로 불러본 지도 까마득한 아끼는 이의 - 인형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대답은 없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있기는 한 건가? 대답은 없다. 내가, 살아야 하나? 대답 대신 등 뒤로 방 문이 열렸다. 걸어들어온 미카를 향해 반갑게 웃어보였다. 미카의 손에는 시내에서 사온 듯한 신문 한 부가 길게 말린 채로 들려있었다. 애써 무시한 채 저녁으로는 무엇이 좋겠냐고 물었다. 떠나갈 사람이었다면 진즉 떠났으리라. 빛을 찾아 떠돌던 까마귀는 계절이 몇십 번을 바뀌어도 결국에는 같은 자리로 돌아왔기에. 사랑스러운 사람, 모처럼 그를 그렇게 불렀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태양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검은 깃털에 감싸여있던 지난날의 까마귀만이 여전히 눈부셨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는 어두웠으나 그 아이가 곁에서 살아 숨쉬는 한은 괜찮을 것 같았다.


 네게서 동정을 받아야 할 만큼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는 게야. 어떻게 알았는지 텐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늘 그랬듯 매몰차게 잘라내자 잠깐의 침묵이 뒤따랐다. 나는 아까워, 이츠키 군이. 정확히는 이츠키 군의 무대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나는 네 녀석의 아까워하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제일 한스럽다고 덧붙여주려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가 왠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전에 없이 진지한 음성. 웃음기도 장난기도, 지난날과 같은 잔인함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래. 무대를 주는 대신 그 무엇도 손대지 않을게. 맹세해. 물론 이건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이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야. 그때 산책을 나갔던 미카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끊지. 뒷말은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것으로 정말 바깥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았다.


 미카는 종종 노래를 불렀다. 제가 그리도 듣기 좋아하는 그 목소리로. 힘 있는 미성이 조용한 집 안에 울려퍼질 때면 그에게로 향하던 걸음조차 멈추고 홀린 듯이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눈이 마주치면, 그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웃었다. 묵묵히 끌어안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이제는 그 존재조차 오롯이 저만을 위해 바쳐버린 연인에게.

 카게히라, 아무래도 나는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게야.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그렇게 이야기했다.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눈을 들어 바라보면서도 별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내도 데려가도."
 "어딜 말이냐."
 "어디든, 스승님이 가려는 곳으로."
 "그게 어디가 될지는 나도 알지 못해."
 "그래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기 낫지 않겠나?"


 그러고 보면 내가 매일같이 너의 눈동자 안에서 보곤 했던 세계는 천국이었던가.


 미카는 요즈음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드나드는 눈치더니 신화(神話)에 관한 책을 두어 권 빌려왔다. 낮에는 주로 책을 읽고, 해가 넘어가면 기척 없이 이쪽으로 걸어와 까치발을 들며 저를 안아주었다. 스승님, 그래서 발할라는 결국 어데였나? 지금도 종종 난데없는 것들을 묻곤 하는 미카에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해주었다. 글쎄다, 여기라고 할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대답이었다. 창문 앞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화르르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이곳은 이미 사자(死者)들의 땅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미카는 이번에도 뭔가 덧붙이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슈는 짐을 챙겼다. 뚜렷한 목적지는 물론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올 때 뭔가를 많이 챙기지 않았기에 여행가방은 비교적 간소했다. 무거운 것은 제 마음밖에 없는 듯했다.

 떠날까, 미카.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여느 때와는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리자 놀라서 이쪽을 향하는 두 눈동자가 노랗고 푸르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가는 것인지,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다만 그저 입을 맞췄다. 애초에 그게 산 자들에게도 허락된 곳이었더라면.


 본래부터라도 발키리의 무대는 항상 완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벽하지 못할 것이라면 적어도 타인들의, 속세의 그것과 차별을 두어야만 했다. 오로지 그것을 위해 더한 것도 포기하면서 걸어왔다. 그렇게 지켜온 길이었고, 둘만의 영토였으며 저희들만의 발할라였다. 마지막이 될 무대를 위해 숨이라고 바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언제가 되든 이곳에서 자취를 감춰야 한다면 적어도 가장 깨끗하게, 우리들답게 마무리하자. 그 언젠가의 한을 떨치려면 우아하게 사라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은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막이 올랐다. 거짓된 천국, 조작된 연옥과 아름답지 못한 지옥은 무대 뒤편으로 모습을 감출 시간이다. 내민 손을 미카는 더없이 눈부신 미소로 맞잡았다. 검푸른 깃털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제왕의 왕홀이 극의 개막을 알렸다. 아주 긴 공연이 될 예정이었다.

 마지막 애도를 보내자. 너와 내가 살아있는 역사가 될 그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