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Once upon a teatime

Rachieh 2017. 6. 23. 13:43

#슈미카_전력

6차 전력 주제 : 티타임

 

 와서 앉거라. 마침 차(茶)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슈는 턱짓으로 맞은편의 비어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잠깐 머뭇거리나 싶던 미카가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과자 그릇의 단 향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빠르게 다가가 앉았다. 하나 먹어도 되나? 차랑 같이 먹으라고 하겠지? 어쩐지 눈치가 보여 손을 뻗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니 차를 다 탈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라는 거다, 예상한 그대로의 말이 들려왔다.

 달그락, 달그락. 슈의 손에 들린 자그만 은색 티스푼이 하얀 찻잔 안을 휘저으며 조금씩 부딪힐 때마다 퍽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오늘은 무슨 차일까. 차에는 영 문외한이지만, 스승님이 준비해준 것이니 분명 맛있겠지. 그가 정성스레 차를 젓던 손길을 멈추고, 얼핏 소꿉놀이용 찻잔보다도 작아보이는 것을 마드모아젤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드 누나도 주는 기가?"
"…뭐, 실제로 마시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기분이야 못 내겠느냐."
"응, 하긴 그렇제."
"네 몫도 곧 준비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도록."


 사랑스러운 앤틱 인형의 앞에 놓인 찻잔을 미카는 한참동안 바라봤다. 찻잔 속의 바다는 잠잠할 줄을 모른다. 부드러운 살굿빛이 도는 것으로 보아, 밀크티인가. 소용돌이는 제법 오랫동안 원을 그리며 돌았다. 밀크티는 홍차에 우유를 탄 것이라 했었지. 홍차는 노을이 지는 하늘을 닮은 붉은색이고.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지금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에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랬다. 그러니까, 인형이 아닌 진짜 사람이. 붉은 눈에 금빛 머리칼을 가진, 미소가 아름다웠던 누군가가.


 석양은 붉었다가 이내 보랏빛으로 변해버린다. 보랏빛은 그의 눈 속에 들어있고. 보라색 사탕, 지금 가지고 있던가? 아니면, 애초에 집에서 가지고 나오지도 않았던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릇에 담긴 색색깔의 과자로 눈을 돌린다. 슈가 직접 구운 꽃 모양의 쿠키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벚꽃, 개나리, 장미, 제비꽃…. 이런 모양은 어떻게 만드는 건가, 싶다가도 하긴 스승님이니까. 금세 납득해버린다. 벚꽃잎을 본따 만든 과자의 색은 그의 머리칼에서 온 걸까. 설탕을 가지고 오겠다며 그가 잠시 등을 보인 사이, 뒤에서 동그란 두상을 바라봤다. 꽃의 색이라 해도 그를 따라올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슈가 마드모아젤의 앞에 놓아둔 찻잔에서는 어느새 파도가 멎어있었다. 붉은색을 띤 홍차에, 곧바로 우유를 넣어버리는 편도 좋지만 보랏빛으로 저물어가는 하늘의 색도, 기왕이면 벚꽃잎도 하나 따서 넣는다면 어떤 색이 나올까. 의상을 만드는데 필요하다며 배색표를 책상 앞에 붙여둔 스승님도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으리라. 잠깐 사이 꽤나 깊은 공상에 빠져버렸다. 붉은색에, 보라색과 분홍색을 섞고… 내 눈을 닮은 노란색도 섞어볼까. 파란 쪽이 아쉬워할 것 같으니 파란색도… 잠깐, 그걸 다 섞으면 무슨 색이 나오지? 망설이다 답을 내놓았다. 결국에는 검은색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그래, 답은 검은색이다. 미카의 머리칼보다도 더 짙고, 더 깊은, 어둠의 색. 저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는다. 까만 세상이 펼쳐졌다.


 카게히라 미카는 붉은 눈의 토끼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토끼를 따라가다니, 다소 비상식적인 그림이었으나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꼭 누군가를 닮았네, 싶으면서도 토끼가 걸음을 재촉하면 덩달아 빨리 걷고, 토끼가 발을 늦추면 같이 눈치를 살피는 식으로 한참동안 숲 속으로 나있는 길을 걸었다. 푸르게 펼쳐진 녹음 틈새로 형형색색의 꽃과 자그만 집이 눈길을 끌었다. 군데군데 피어난 화려한 버섯도. 색으로 보아 저건 아마도 독버섯이려나, 저 집은 인형의 집이겠지.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미카 쨩, 서두르렴! 차가 다 식어버릴 거란다.

 기억 속의 익숙한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했다. 마드 누나? 그럼 스승님도 같이 있다는 건가?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넘어지지 않으려고 땅을 보며 걷던 미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곳에는, 전혀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비췄다. 유리로 된 테이블 위에는 귀여운 디자인의 티포트와 찻잔이 놓여있고, 마드모아젤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긴다. 미카를 여기까지 이끈 토끼도 어느 틈엔가 자연스레 그 그림에 끼어있고, 고양이와 다람쥐 같은 동물들도 저마다 한 자리씩을 잡고 앉아있었다. 동화책 속의 티타임을 구현하면 이런 모습일까. 감탄하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름아닌 그가 앉아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야기였다.


"스승님…!"
"감탄은 그쯤 하고, 얼른 와서 앉으라는 거다. 차가 다 식지 않았느냐."
"내 줄라고 다 만든 기가?"


 눈을 빛내며 묻자 슈는 어쩐 일인지 부정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미카가 앉을 의자를 빼준다. 고맙데이, 스승님. 때를 모르고 뛰는 심장을 뒤로 한 채 조심스레 말문을 떼었다. 부드럽게 웃어보인 그가 직접 미카의 잔에 차를 따랐다.


"지금쯤이면 알맞게 향이 우러났을 게다."
"으응… 고맙데이."
"천천히 마시도록. 다과도 많이 가져왔으니까 말이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못 보고 지나쳤는지, 매일같이 곁에 두고 잠들던 분홍색 토끼 인형이 바로 옆자리에서 쿠키를 하나 권해왔다. 단추로 된 눈을 바라보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평소에도 좋아해서 종종 먹곤 했던 라즈베리맛 과자였다. 미카 쨩, 차도 마시면서 먹으라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여느 때처럼 아라시가 이쪽을 보며 상냥하게 웃고 있다.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고 조심히 양손으로 감쌌다. 익숙한, 기분 좋은 향이 난다. 다즐링 홍차였던가. 슈에게서 매번 전해듣지만 매번 잊어버리곤 했던 이름이 잡힐 듯 말 듯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기야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그가 주는 건 뭐든지 좋았으니까. 차를 조금씩 마시고 있자니 슈의 손이 불쑥 머리 위로 올라왔다. 잠깐 멈칫하다가 익숙하게 머리칼을 헤집어오는 손길에 절로 눈이 감겼다.


"오늘은 연습이 없다, 카게히라."
"에, 와 갑자기? 스승님, 항상 연습 빼먹지 말라고 내한테 뭐라캤으믄서."
"하루쯤은 다 잊어버리고 쉬는 것도 필요하다는 게야."
"…으응… 글나."


 집으로 돌아가면 메인테넌스를 해줄 테니 시간은 비워두거라. 천천히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제일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차는 달았고 슈의 한 마디 또한 강력했다. 접시에 넘치도록 담긴 과자를 몇 개 더 집어먹을 때까지도 그에게서는 드물게 어떠한 지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별자리 운세가 좋았었나. 어느 틈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찻잔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하늘에서는 어느새 예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스승님,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건 싫어하지 않았던가?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는 슈를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지만 어떠한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스승님."
"왜 그러지."
"우리 집에 안 가나?"
"돌아가고 싶은 건가."


 방심한 새 불쑥 얼굴을 눈앞으로 들이미는 통에 숨이 멎을 뻔했다. 아니, 그런 기는 아이고…. 더듬거리며 말을 잇자 평소에는 보기 드문 웃음을 지으며 눈을 휘기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어버렸다. 보라색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자신의 얼굴이 환하게 웃음짓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자꾸나. 노을 구경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니."
"응, 내는 윽수로 좋다. 어두워질 때까지 있으믄 안되나?"
"감기에 걸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것도 좋다. 내 감기 걸리믄 스승님이 간호해줄 기고…?"


 초콜릿칩이 박힌 쿠키를 반으로 쪼개던 미카가 순간 머릿속으로 다른 계산이라도 하는 듯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참, 그 전에 건강을 챙길 생각부터 하라는 게야. 앞서나간 말은 퉁명스러우나 표정만은 온화해서, 미카는 재빨리 쿠키 한 조각을 슈에게 건넸다.


"뭔가."
"에~ 스승님도 과자 좀 묵어라. 너무 내만 묵는 것 같아가 미안하데이?"
"어차피 모두 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니 상관 없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눈치로, 눈을 빛내며 손을 뻗고 있는 미카에 못 이긴 듯 받아먹었다.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것이건만 분위기 탓인지, 미카로부터 받은 탓인지 유난히 달게만 느껴졌다. 집에 돌아가면 레시피를 조금만 더 연구해볼까. 체중 관리도 중요하지만 일단 잘 먹이는 게 관건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해가 제법 기울었다. 옆에서 토끼를 쓰다듬고 있는 미카에게는 돌아갈 마음 같은 건 없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공기가 꽤 차니까.


"카게히라."
"응?"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참말이가?"
"그래. 해도 제법 기울었고 말이지."


 미카는 아쉬운 듯 삐죽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집에 가서 메인테넌스를 해주겠다 했으니, 그 약속은 지켜주겠지. 토끼인형을 챙기며 슈의 뒤를 따랐다. 짧았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티타임이었다고, 미련이 남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지는 걸 꾹 참으며 미카는 걸음을 옮겼다. 언제 다시 이런 곳에 올 수 있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그런 생각이 피어올랐지만 왠지 가져서는 안되는 의문인 것만 같은 느낌에 자꾸만 속으로 눌러담으면서.



"이제 일어난 겐가."


 미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잠, 들었었나. 대체 언제? 당황해 버벅거리는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응아아… 스승님, 내 잠들어삔 기가?"
"그래. 설마하니 설탕을 가지러 간 사이에 잠이 들어버릴 줄이야. 그냥 내버려두면 아침까지라도 잘 기세더구나."
"미안타…."
"나에게 미안할 건 없지 않느냐. 그러게 아르바이트는 적당히 하라고 그렇게 일러주었건만. 오늘 연습은 없다. 물론 아르바이트도 나갈 생각 말도록."


 응, 알았다!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잠깐 멍해있다가도 금세 활짝 웃음짓는 미카를 의아한 듯 바라보던 슈가 바람 새는 소리로 덩달아 웃어버렸다. 아마 꽤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이지.


"그나저나, 꿈이라도 꿨던 게냐.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던데."
"…응? 으응…. 분명 윽수로 기분 좋은 꿈이었는디, 기억이 안 나가 속상하데이."
"지금 다시 잠들어서 마저 꾸고 싶다든가 하는 말은 삼가도록. 지금은 부실 문을 잠가야 할 시간이니 말이다."


 정곡을 찔린 듯 풀이 죽어버리는 미카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내저은 슈가 미카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얼마 전 슈에게서 받은 자그만 인형이 가방 지퍼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가방을 매던 미카가 문득, 테이블 한 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티포트를 보고는 놀라 입을 열었다.


"있제, 스승님. 설마,"
"응? 왜 그러지."
"아까 티타임… 내 때문에 망친 기가?"
"그걸 이제서야 깨달은 게냐. 덕분에 애먼 마드모아젤만 차를 두 잔이나 마셨단 게야!"
"응아, 참말이가? 미안타, 마드 누나…."
"됐다, 지금은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구나."


 복도로 나와, 쌩하니 앞질러 가버리는 슈를 미카는 잰걸음으로 뒤쫓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꿈 속에서, 스승님이랑 마드 누나랑 다같이 차를 마셨던 것 같은데. 나루 쨩도 있었고, 토끼 인형도 있었다.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따스하고 달콤한 꿈이었다. 깨어나버린 게 아쉬울 만큼.


"스승님, 내가 잘못했데이…. 같이 가자. 스승님 다리 길어가 따라가기 힘들다아…."
"그냥 네가 제대로 못 따라오는 것 아니냐는 게야. …이리 오거라, 가방을 들어줄 테니."
"응아, 고맙데이!"
"오늘은 메인테넌스를 해주마. 요즘 네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구나."
"응? 아니, 소홀하진 않았다. 스승님 단 한 번도 내한테 소홀한 적 없었데이."
"그럼 메인테넌스도 필요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그기는 당연히 안된다! 해도! 꼭 해도, 스승님! 내 지금 멘테 안 받으면 죽어삘 것 같데이!"
"말에는 주의를 기울이란 게야!"


 그래도 이 현실보다 더 행복한 꿈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다시금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붉게 해가 지고 있었다. 어떤 꿈보다도 더 선명하고, 더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