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어떤 여름철의 단상

Rachieh 2017. 5. 28. 22:02

#슈미카_전력

4차 전력 주제 : 소나기

작업 bgm : 월피스카터 - 나팔꽃 질 무렵에

 
 스승님, 내 알바 다녀오께.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미카가 내내 저를 바라보는 슈의 시선을 느꼈는지 머쓱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슈는 별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고 미카의 손에 우산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냐는 듯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오후에 비 소식이 있다더구나, 짧게 덧붙이고는 어쩐지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어 눈을 피했다. 아, 글나. 대수롭지 않게 우산을 받아든 미카가 이내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내는 스승님 없으믄 큰일난데이."
"…조심히 다녀오거라."
"응. 스승님도 밥 잘 챙겨묵고. 끝나는 대로 집에 올 테니께, 저녁은 같이 묵자."


 혼자 들어오기 싫으면 연락해도 된다. 혹시 비가 생각보다 많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전화를 걸면 차라도 타고 마중 갈 테니…. 까지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말들이 내 그럼 갔다 온다! 라며 문이 닫히는 소리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흩어져버렸다. 급하게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일러줬건만. 그건 비단 덜렁대는 성격의 미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서만은 아니다. 이렇듯 제가 하고 싶은 말도 못 들은 채로 집을 나서버린 게 벌써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렇지.

 굳게 잠겨버린 현관문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던 슈가 괜히 제 머리칼을 헤집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연히 미카가 눌러앉아버린 자신의 방에는 아이의 취향이 가득 묻어나는 오컬트 소재의 그림이며 영화 포스터가 잔뜩 붙어있었다. 침대에는 미카가 가지고 들어온 인형이며 목베개가 산처럼 쌓여있다. 이런 것들을 들이는 걸 애초에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기야 제일 처음에도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설마 이 많은 걸 다 가지고 들어올 참이냐고 물었을 때, 마지못해 허락을 내렸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웃던 얼굴에 미련이 남아 끝내 거절하지 못했을 뿐.


 약해지고 만다. 두 번 다시 사람을 인형처럼 대하고 인형처럼 사랑하는 건 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누군가에게 있는 힘껏 쏟아부은 마음이 버려졌을 때 너덜해진 감정의 조각을 붙들고 울어야 하는 건 자신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결함투성이 실패작인 카게히라 미카의 앞에만 서면 이상하리만치 약해지고 말았다. 원래의 주장을 끝까지 펼칠 수가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소나기가 거세게 퍼붓던 날,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기묘한 아이와 처음 마주쳤던 그날부터. 아이는 그가 자신에게만 강경하고 엄격하게 나온다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건 그의 반밖에는 보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줄곧 모질게 굴었어도 먼저 굽히는 쪽은 슈였기에.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미카가 웃을 때면 저도 모르게 심장께가 간질거리고, 조금이나마 힘든 기색을 내비치면 억지로라도 쉬라며 기어코 침대에 눕혀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한 번이라도 더 웃게 해주려 평소에는 미의 기준에 어긋난다며 눈길도 주지 않던 곰인형이니 강아지 인형 같은 것들을 잔뜩 사들여서는 품에 안겨준 적도 있었다. 가끔 치수를 잘못 재서 남는 원단이 생길 때면 마드모아젤이 아닌, 미카가 유독 아끼는 분홍색 토끼 인형에 입힐 옷을 만들기도 했다. 이례적인 일이라고 키류는 혀를 내둘렀었다. 단순히 인형에 대한 인형사의 의무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이 퍽 애틋했었지. 아마도 미카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는 채로,


"스승님, 내 왔다! 오는 도중에 비가 그쳐가 우산은 별로 안 젖었데이."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내고 운동화를 정리한 뒤 집안으로 들어온 미카에게 여느 때처럼 저녁을 차려주었다. 밥을 먹는 내내 아이는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간만에 손님이 적어서 편했다든가, 영업시간이 40분 정도 남았을 때 일찍 마감을 할까 했는데 나루 쨩과 윳군이 조각케익을 사러 와서 반가웠다든가. 원래대로였더라면 직원들 중 막내인 제가 다 했어야 할 일들을 친구들이 도와줘서 고마웠다며 햇살처럼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학교 근처까지 함께 걸어왔다고 신이 나서 자랑을 한다. 낯가림이 심해서 걱정했던 건 이제 기우에 가까웠다. 제가 없는 곳에서도 자신을 위해주는 이들을 찾아, 저토록 밝게 웃을 수 있게 되다니. 지난날 제가 아끼던 다른 이에게서 느꼈던 배신감과는 달리 모종의 뿌듯함마저 피어올랐다. 이것도 나름의 성장이라면 성장이리라. 일전에 일러준 대로 편식도 곧잘 고쳐가는 중이었고. 왠지 모를 감정에 미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의구심으로 저를 바라보던 눈이 금세 경계를 풀고 예쁘게 휘어진다. 애초에 경계라는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츠키 슈에게만큼은.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피곤했는지 먼저 자리를 잡고 누워있다. 휴일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러게 몸도 생각하면서 적당히 하라고, 되새기듯 하는 말은 제대로 전해지긴 한 걸까. 눈을 감고는 있으나 잠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손을 뻗어 뺨을 쿡 찔러볼까도 싶었으나 그냥 손등으로 조심히 쓸어보았다. 뒤이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기 무섭게 미카가 반짝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본다.


"…자는 줄 알았건만."
"으응… 깨삣다."
"의도치 않게 잠을 깨웠구나."
"아이다, 스승님 얼굴 한 번 더 보믄 내야 좋제."


 인자 잘 기가? 답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로, 눈을 빛내며 그리 물어온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익숙하게 품을 파고드는 미카를 한 팔로 조심히 안았다. 옆에 있을 테니 마음 놓거라. 어쩐지 제가 더 불안한 눈치로 귓가에 속삭인 말에 아이는 대답 대신 옷깃을 끌어당겼다. 있제, 스승님. 둘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깝지 않았더라면 놓쳐버렸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겨우 시야를 같게 한 보람도 없이 미카는 잽싸게 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밖에 비 오나?"
"그런 것 같더군. 빗소리가 들린다는 거다."
"…스승님이 있어가 다행이데이."
"무슨."
"내는 비 오는 거 윽수로 싫어한다 안카나. 스승님도 알제?"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간 눈에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빨려들어가기라도 할 것만 같아서, 어깨를 감싼 손의 힘을 풀 수가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스스로를 인형사라, 이 세계의 신이라 칭하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굴던 이가, 고작 제 품에서 소낙비가 두려워 떨고 있는 까마귀에 동요하다니. 하지만 그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래도 그날만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겠구나, 나를 처음 만났던 날 말이다. 미카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있다 아이가, 스승님."
"듣고 있다."
"비가 오믄, 떠날 기다."
"…."
"곧 있으믄 장마제… 그때는, 참말 떠날 기라."
"카게히라."
"괘안타. 비는 금방 그칠 테니께."


 느리게 등을 쓸어내리던 손길이 순간 멈칫하더니 두 번 다시는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 작은 머릿속에서 어떤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인지는 끝내 물을 수 없었다. 미카 역시도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눈치였으나 몇 번 입술을 달싹이는 게 다였다. 마침내 미카가 깊이 잠들 때까지도, 슈는 끝내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후로도 미카는 종종 비슷한 유의 말들을 입에 올리곤 했다. 방과후에 불쑥 다른 층에 위치한 저의 교실로 찾아왔을 때도, 수예부실에서 자수를 놓다가도,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난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도. 손을 잡고 단둘이 한적한 길을 걸을 때나, 조금 대범하게 연습실에서 입을 맞춘 뒤에도. 너무도 불쑥,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치고 들어와버려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을 정도였다. 매번 갑작스러운 아이였기에, 이번에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 예고에도 없이 잠깐동안 무섭게 퍼붓다가 개어버리는 소나기처럼. 이제 미카의 경고 아닌 경고는 어떤 효과도 갖지 못했다.

 습관처럼 평생이며 영원을 논하던 아이다. 이 세상의 경지를 넘어 지옥 끝까지라도 함께하자며 겁도 없이 다른 세계를 입에 올리던 아이였다. 사실은 그래서 실감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아이가 꿈꾸는 만큼만,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만큼만. 딱 그 정도만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딱 그 정도만.


 사람으로서 인형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 때는 품에 끼고 저 좋을 대로 예뻐해주면서, 온갖 예쁜 옷을 입혀주고 장신구로 꾸며주다가 싫증이 나면 손에서 놓아버리면 그만이었기에. 이츠키 슈에게 있어 카게히라 미카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존재였다. 수시로 금이 간 곳이 있지는 않은가 점검하고, 손을 봐줘야 한다는 점에서 이제껏 봐온 다른 인형들과 달랐을 뿐. 그랬던 아이가 퍽 대범하게 제 방을 차지하려 들고, 불쑥불쑥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한 순간 더는 그를 인형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웃는 얼굴을 볼 때면,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일상적인 기쁨과는 또 다른 감정이 퍼져나갔다. 그건 차라리 혼란이었다. 인형사로서는 확실히 결격이라고, 미카가 웃을 때마다 생각했다. 하루하루 아이가 말했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서로를 탐한 날이면 슈는 꼭 미카를 제 손이 닿는 거리에 두고 잠들곤 했다. 아예 팔 안에 가두다시피 끌어안고 눈꺼풀을 닫아버린 적도 많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으니까. 미카의 말처럼 비는 금세 그칠 테다. 하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상실은, 텅 비어버릴 마음과 몸은. 그것만큼은 이 아이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기에.


- 올 여름도 장마가 찾아왔습니다….  


 원래 아침 시간대에 텔레비전은 잘 틀지 않았지만 일기예보를 확인하기 위해 습관처럼 켜두고 있던 공중파 채널에서는 벌써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하복을 입고 등교한 지도 벌써 꽤 되었다. 장맛비가 지나가면 다시 한바탕 더위와 씨름해야 할 테지. 아침 대신 구워준 크로와상을 그새 다 먹은 미카가 크로스백을 매며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스승님, 오늘은 내 먼저 가봐도 되나? 나루 쨩이랑 같이 가기로 했데이."
"그러도록. 조심해서 다니고, 우산은 챙겼나."
"…응아, 맞다. 내 또 깜박할 뻔했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헤실거리며 웃는 아이의 손에 제대로 접이식 우산을 쥐여주었다. 影片. 근처 가게에서 우산을 사다주면서 언젠가의 자신이 또박이 적어두었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고맙데이, 스승님. 내 다녀오께! 하얗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가볍게 흔들리는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어째서인지 아이를 다시 보기가 힘들 것만 같은 느낌에, 뒤늦게 현관문을 열고 밖을 확인했으나 이미 시야에서 떠나버린 뒤였다. 허망한 심정으로 미카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쪽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많이 늦지는 않을 기다, 내 꼭 돌아올게. 불안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내용이었다. 비는 금방 그칠 거라고, 늘 말하던 너였으니까.


 이 비가 그칠 무렵에는 돌아와줄까.


 카게히라 미카가 없는 일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어색했다. 마치 나사 하나가 빠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A반 녀석들에게서 어디 아프냐는 물음을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더위 탓에 컨디션이 저조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지만, 팔 위에 얹어둔 인형과 이상하리만치 사람을 잘 꿰뚫어보는 츠무기의 눈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슈 군, 역시 그 아이가 보고 싶은 거지? 다 알아. 나도 벌써 미카 쨩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은걸….'"
"어라, 슈 군. 그 복화술 또 시작하는 건가요?"
"작업에 방해된다, 아오바."
"미카 군은 하루종일 말 걸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역시 어딘가로 가버린 모양이죠?"
"…흥, 그것은 이제야 제 분수를 깨달은 것 같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횃대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야."


 처음부터 그렇게 여겨줬으면 했는데, 이제서야 내 뜻을 알아채다니. 실패작답다는 거다. 담담하게 말을 이으며 바느질감으로 눈을 돌리는 슈를 한참 바라보던 츠무기가 흘려보내듯 한 마디를 떼었다. 그래도 슈 군, 지금 외로워보이는걸요. 그 아이가 있었을 땐 싫증을 내면서도 결국엔 웃었던 걸 잊어버린 건가요? 드물게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고개를 들어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게 말이다, 잠깐 잊어버렸던 모양이군."


 차라리 자책이었다. 미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여전히 슈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설령 뒤돌아보지 않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아프겠지. 뻥 뚫려나간 자리로는 미처 전해주지 못한 마음의 조각들이 새어나와, 두 번 다시는 주워담을 수도 다른 누구에게 줄 수도 없이 되어버릴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멈춰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카는 분명 돌아오겠다고 했었기에. 자신과 한 약속이라면 잊어버릴 리 없는 아이였으니, 그게 언제가 되든 여느 때와 같이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다시 저를 만나러 오겠지. 그때는 어찌 되었든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작 까마귀 인형 하나의 부재로 침울해있는 모습은 아무리 미카라 해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비록 혼자였으나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가끔 츠무기의 바느질을 도와주기도 했다. 더 가끔, 내키지는 않았으나 텐쇼인이 주관하는 학급 모임에도 참가하고. 고급 원단을 구하러 혼자서 제법 멀리까지 발품을 팔고 다니기도 했다. 비는 연일 내렸다. 우산을 접어들고 빗방울을 툭툭 털어낼 때, 학교 처마 밑에서 우산을 펼쳐들 때 문득문득 아이의 빈 자리를 느꼈다. 체온의 부재를, 어떤 의미의 부재를 체감했다. 장마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외로움이었다. 일기예보에서 장마의 끝을 언급할 즈음, 어느 순간부터인가 미카는 이미 자신의 인형이 아니었음을 씁쓸하게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날 몇 시라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그리고 사람이 되어버린 미카를 자신이 제법 아끼고 있었다는 것 역시도.


 사랑이었다. 방 안에서 바라본 창문을 타고 빗방울이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저 정도의 속도로, 어쩌면 그보다도 더 빠르게 그 아이를 받아들였을까. 그 무렵 햇볕이 다시 쨍해지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우산은 필요 없었다. 혹시나 싶어 가지고 나와 가방 안에 넣어두긴 했지만 부러 꺼내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집을 불과 몇 걸음 앞에 두고 차츰 느려지던 슈의 발이 뚝 멈춘 것은.


"…?"
"다녀왔데이, 스승님."


 하복 차림의 미카가, 몇 주 전 먼저 집을 나서겠다며 인사를 건네던 아침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에도 만났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인사였다.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앞으로 걸어가 시야를 똑같이 했다.


"잘 다녀왔느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말도 없이 사라져가 놀랬제….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한 미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두려웠데이."
"…무엇이?"
"다… 기냥 다. 내사 스승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비가 오고 있었는디,"
"…."
"그때랑은 다른 눈으로 스승님을 보고 있는 것 같아가…."


 내가 변해가는 기 두려웠다. 그렇게 말하며 아이는 조금 슬프게 웃어보였다. 비가 올 때마다 흔들렸다고, 다시 비가 오면 그때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결론은? 모나지 않은 물음에 미카가 조금 울 것도 같은 표정으로 제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좋아한데이, 스승님."
"…."
"내 같은 인형에도 마음이 깃드는 날이 다 있네. 좋아한다, 스승님. 스승님은 내를 우째 생각해도 좋으니께…"


 더 이상 듣는 대신 미카를 힘껏 끌어안았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 길을 잃고 헤매던 시선이 슈의 옆얼굴에 내려앉았다. 잘 왔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소리에 응, 낮게 대답하며 품을 파고든다. 집을 떠나있는 동안 나와 똑같은 걸 깨달은 모양이구나. 답을 듣고 나서야 미카는 햇살처럼 웃었다. 등 뒤로 녹음이 짙어지고 있었다. 길었던 장마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