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감정의 범람

Rachieh 2017. 4. 30. 18:45

#슈미카_전력

2차 전력 주제 : 꽃


 

작업 bgm : Superfly - 愛をこめて花束を
 

* 미카의 졸업식을 앞둔 시점



 가끔 두고 온 것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익숙한 동경(東京)을 떠나 장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유럽의 어느 도시, 종종 말머리에 덧붙이곤 하던 낱말이 일상어처럼 쓰이는 이곳에 온 지도 곧 있으면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모처럼 일과를 일찍 마친 이츠키 슈는 시침핀이며 원단 조각들로 어지럽혀진 책상 위를 정리하다가, 뒷면이 보이게끔 뒤집어둔 액자가 눈에 들어오자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양, 혹은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심호흡까지 한 뒤에야 액자로 손을 뻗었다.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청춘의 추억이 그 안에 있다. 건네받은 꽃다발을 안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건, 늘 그 자리에 있어줬던 아이. 누구보다 많이 울었던 주제에,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에 누구보다도 아무렇지 않은 듯 활짝 웃어보이던, 카게히라 미카. 종종 연락하던 키류와의 통화에서 녀석은 향수병에는 안 걸렸냐며 물어오곤 했다. 그런 거, 없다는 것이다. 여느 때처럼 무뚝뚝하게 답하다가 고개를 돌리면, 사진 속의 카게히라가 이쪽을 향해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나는 안 보고 싶은 모양이다, 이츠키?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장난스런 투로 돌아오는 키류의 뒷말에는 늘 끝내 답해주지 못했었다. 향수병 같은 건 없다고 딱 잘라 말해놓고서, 고작 사진 한 장에 울 것 같아져버리다니.

 이곳에 오기 위해 짐을 챙길 때 제일 먼저 캐리어에 담았지만, 정작 제일 늦게 꺼내본 물건이기도 했다.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어서,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시간을 써야 하니까. 등등 허울 좋은 말들로 포장했지만 결국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무너져내리기 싫었다. 제가 없어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을, 적어도 그렇게 해야 할 그 아이에게 미안해지기는 싫었다. 무엇이 넘쳐흐르는 게 그리도 두려웠던 걸까. 새로운 학교에서 식사를 같이 할 사람쯤은 만들고, 남는 시간을 보낼 장소를 찾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야 그제껏 가방 한 구석에 얌전히 들어앉아있던 액자가 떠올랐었다. 해사하게 웃는 아이의 눈을 그리 오래 바라보지도 못하고, 차마 다시 어디에 집어넣지도 못한 채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이다.

 연민일까, 그리움일까. 그도 아니면 그 너머의 다른 무엇일까. 그날처럼 웃어보려고 입꼬리를 조금씩 끌어올려보지만 역시 무리다. 다만 조금 웃었다. 곧 있으면 그 아이의 졸업식이었다. 보러 가겠다고, 제가 직접 돌아가겠노라고 약속했던. 그 말에 아이는 여느 때처럼 예쁘게 웃으며 다섯째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가 열 살이냐, 여덟 살이냐. 말은 곱지 못했지만 표정만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사진 속 미카의 얼굴을 조심히 손끝으로 쓸다가, 달력에 표시된 날짜를 확인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사진만으로 그리워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 되리라. 도안이 빼곡하게 들어찬 습작 노트를 펼치는 손길이 가벼웠다.


*


 여보세요, 스승님? 내다, 내. 곧바로 받을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미카는 신호가 제법 간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편지는 몇 번 오갔다지만 목소리를 듣는 건 꽤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놀라울 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음성에 살짝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다, 카게히라."
["응, 안데이. 그동안 우째 지냈나? 내는 스승님 보고 싶어가 죽는 줄 알았는데 연락도 한 통 읎구. 섭하데이."]
"어쨌든 잘 살아있지 않느냐."
["그캐도…."]
"곧 귀국할 예정이다."
["응앗, 내 보러 오는 기가?!"]


 귀가 아플 만큼 쩌렁쩌렁 울려대는 탓에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잠깐 휴대폰을 귀에서 떼었다. 그래, 너를 보러…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이 뒤이은 미카의 말소리에 본전도 못 찾고 말려들어가버렸다. 내사 스승님 오믄 들려줄라꼬 노래도 윽수 열심히 연습했데이, 아, 또 내 맨날 틀렸던 턴 동작 있제, 그것도 잘하게 됐구… 얼마 전에는 드림페스도 이겼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선하게 그려지는 풍경을 들떠서는 읊어주는 목소리에 저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카가 먼저 자랑을 해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잠깐 이렇게 듣고만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 찰나, 별안간 말을 멈추더니 스승님은 내한테 해줄 말 읎나? 라며 화제를 돌려버린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눈앞에 있었더라면…. 잡념을 쫓으려는 듯 몇 번 고개를 가로저은 슈가 겨우 입을 떼었다.


"벌써 네 졸업이 가까운 건 신경 안 쓰는 건가. 그때 말해주마."
["으응… 그라모 기다려야제."]
"뭔가 필요한 건 없나, 면세품이라도?"
["내는 그런 거 읎다. 스승님만 있음 되는디 그런 기 다 무슨 소용이가."]
"정말이지 너란 아이는… 알겠다. 곧 보자꾸나."


 응, 기다리고 있을게! 쾌활한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 후에 찾아온 정적이 어쩐지 허전해서, 슈는 오늘따라 더 휑해보이는 방 안을 느리게 둘러봤다. 시야보다 조금 높은 유리 장식장 안에서 한 쌍의 초록색 보석 안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예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으나 여전히 따스한 시선이다. 한때 망가진 세계를 품어주었던 소중한 인형은 이제 그저 본연으로 돌아가, 어떠한 타박도 칭찬도 들려주지 않는다. 벌써 일 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일이었다. 홀로 서기로 마음먹고, 그 아이의 곁을 떠나온 지도 얼추 비슷했다. 당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미카를 위해서도 절실하다는 판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이 헤매었을까.

 그저 결함 투성이 인형이었던 아이. 아직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불안은 어느새 조금 다른 의미로 변모해있었다. 언제까지고 옆을 지켜주면서, 습관처럼 평생이며 영원을 논하던 미카를 계속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차츰 한구석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함께하고 싶다고. 오로지 한 단어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어느 순간 마음의 정체를 깨닫고 나자 찾아온 것은 혼란이었다. 실패작이라는 호칭을 버리고, 늘 그랬듯 안겨오는 아이를 어설프게나마 쓰다듬는 것으로 서툴기 그지없는 표현을 보내기 시작했다. 느리게나마 따스해져가는 반응에 미카 역시도 차츰 적응해가는 눈치였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으로 정을 붙였다가는, 제가 아이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것만 같아서. 더는 차갑지 않은 시선에, 조금이나마 더 마음을 실으려는 시도는 끝내 실패한 채 슈는 미카를 떠나왔다. 일 년 뒤에 찾아오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떨어져지낸 시간은 외롭기는 했으나 그리 쓰라리지만도 않았다. 부러 모든 연락통을 끊고, 모교와의 소식도 단절된 채 가끔 미카가 편지에 끼워 보내오는 사진만으로 아이의 위치를 대강 가늠했을 뿐.


 미카가 스스로의 손으로 재건한 발키리는 완벽했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그건 그것대로 아이의 의사와 이상이 담긴 결과물이었기에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멀리서 보기에도 카게히라 미카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그걸로 충분했다. 스승님, 멀리서도 용케 저를 알아보고 달려와 폭 안기는 미카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다, 스승님."


 정작 제 얼굴은 보지도 않고 가슴팍에 얼굴만 파묻고 있으면서 웅얼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꽃이 엉망이 돼버렸지 않느냐. 미카를 느리게 품에서 떼어낸 뒤 정성스레 만든 꽃다발을 건넸다. 뜬 눈으로 꿈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멍하니 슈의 얼굴과 손에 들린 꽃다발을 번갈아 바라보던 미카가 천천히 웃으며, 고맙데이, 답을 돌려주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파동이 이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기도 했다. 

 그제야 일 년간 겪어왔던 향수병의 근원지를 깨달았다. 뒤에 두고 온 것은 달리 있지 않았으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아이의 빈 자리가 그렇게 컸었다는 것을. 셀 수 없이 많은 카게히라 미카의 얼굴을 보았고, 이츠키 슈가 사랑하는 카게히라 미카의 모습 역시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단연 미카가 가장 행복할 때 지어보이던 미소였다. 머리 위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던 시절, 변치 않고 자신의 세상을 비춰주던 그것이었다.


"졸업, 축하한다. 카게히라."
"…응."
"고맙다."


 건네준 꽃다발을 조심히 안아든 채 신기하다는 눈으로 찬찬히 빛깔을 살피던 미카와 불쑥 눈을 맞췄다. 내는 해준 것도 읎는데 스승님이 뭐가 고맙나…. 나오는 말은 얼핏 퉁명스러우나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출 길은 없었다. 말도 안 되게 솔직한 그 모습에 다시 무심코 웃어버렸다.


"그… 스승님, 내 보믄 할 말 있다카지 않았나."


 한참 제 얼굴에만 머무르는 시선에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보던 미카가 망설임 끝에 말을 꺼냈다.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아아, 하고 운을 떼니 미심쩍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팔을 뻗어 촉감 좋은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헤집히는 대로 눈을 감고 맡기던 미카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슈의 음성에 느리게 눈을 떴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은 사람이라는 거다."
"응, 잘 알고 있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미 결정된 거 아니었나? 스승님, 일 년만으로는 유학 축에도 안 낀다캤었…"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응…… 으응? 응아아?!"


 들고 있던 꽃다발까지 떨굴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붉어진 얼굴로 올려다본 슈의 옆모습 역시 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꽃다발을 고쳐안은 미카가 잠깐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참말 내로 괘안켔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말한 것이다, 카게히라."
"그캐도."
"일 년만에 내가 하는 부탁을 거절할 셈인가. 그렇다면 곧바로 오후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겠어. 오늘은 네 졸업식을 보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니까 말이지."
"아, 아이다! 내도 가고 싶다아!! 데려가도!!"


 부러 뒤를 도는 척을 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제 앞을 막아선다. 평생, 아니 이 생이 끝난 뒤까지도 함께하자던 아이가 아니던가. 깊이 시험해볼 마음은 없었지만 곧바로 돌아오는 반응에 뭔가 더 하려던 마음도 접었다. 미카라면 그게 어디든 따라와줄 것이기에. 그 마음에 화답하는 것은 이제 저의 몫이었다.


"일단 본가에서 몇 주간 머물 생각이다. 함께 가자꾸나, 카게히라."
"응… 내는 좋다."
"그동안 정말,"
"…."
"고생했다."


 미카는 다시 한 번 꽃이 만개하듯 기쁘게 웃어보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지난날의 자신은 한없이 서툴었고, 그 시간이 때로 아이에게 생채기를 내어왔으리라는 것뿐. 숱하게 상처 받고 눈물을 삼키면서도 곁에 있어주었다.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의 온도를 느끼고, 늘 웃어주던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었나.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면 후회하게 될 쪽은 이제 슈 자신이었다. 그래서, 붙잡으려고 돌아온 것이다.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려고. 어차피 이제는 놓을 마음도, 놓을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 기뻐하는 모습을 가능한 한 조금만 더 오래 눈에 담아두고 싶어 꽤나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항상 마지막에는 카게히라 미카가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늘, 카게히라 미카가 그 길의 끝에서 손을 내밀어주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이 꿈에서 깨지 말아달라고.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몇 번을 헤어졌어도 결국에는 다시 만났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슈는 조심히 미카를 끌어안았다.


"헤에, 스승님. 내 오늘 졸업이라고 안 하던 거 많이 해주네? 웬일이가."
"전에 네가 했던 말,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평생 따라오겠다고 했던 것 말이다."
"내사 딴 건 다 잊어뿌러도 스승님이랑 한 약속은 절대…"
"부탁이 있다."


 부디 나를, 놓지 말아다오. 의 고백이었다. 천천히 귓가를 파고드는 말소리에 미카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다시 헤매이게 된다 해도 그리 마음쓰지 않기로 했다. 몸도 마음도, 언제나 결국에는 이 아이의 곁으로 돌아왔었기에. 그리고 이제는, 제가 결코 놓지 않을 것이기에. 드물게 햇살이 따스했다. 슈는 마주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나 함께해줄 사람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비로소 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