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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스바나츠] 여름으로 가는 길
Rachieh
2017. 3. 11. 22:35
봄은 싱숭생숭한 계절이었다. 유메노사키에는 대대로 내려온 '답례제'라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교정을 떠나는 삼 학년을 위해 잔류하는 후배들이 무대를 꾸미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였지만 사실상 허울 좋게 꾸며놓은 이별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케호시 스바루가 속해있는 유닛 '트릭스타'는 전원이 이 학년이었기에, 정든 유닛의 선배가 졸업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멤버들은 저마다가 속한 동아리의 부장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스바루 역시, 작별인사를 했다. 그동안 귀찮다고만 여겨왔던 농구부의 부장, 치아키에게. 그는 언제나처럼 환히 웃으며,
고맙다, 아케호시! 나의 태양!
경쾌하게 답해주었다. 항상 나를 태양이라고 불러줬지만, 정작 그건 그 자신에 좀 더 가깝지 않았을까. 교실에 가기 위해 텅 빈 복도를 가로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조금 우울해진 기분이었다. 치쨩 부장,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까 슬픈데. 당연히 잠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교실 문은 뜻밖에도 쉽게 열렸다. 안에 누가 있나? 스바루는 천천히 교실 안으로 한 발짝을 내딛었다. 창가 쪽, 뒤에서 세 번째 줄 책상에 엎드려있는 사람이 보였다. 조금 긴 듯한 붉은색 머리칼. 나츠메였다. 움직임은 없었지만 답례제가 끝나버린 지금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혹시라도 울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잽싸게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려던 찰나 바루 군,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기척에 놀랐는지, 그러나 조금도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는 노란색 두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자는 줄 알았는데. 소란스러워서 깬 거면 미안해. 어쩐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걸 느끼며 아무런 말이나 나오는 대로 마구 내뱉었다. 그때껏 제 얼굴에 고정된 채로 꼼짝 않는 나츠메의 시선에, 조금은 홧홧거리는 걸 느끼며 가방에 꽂혀있던 클리어파일을 꺼내 어설프게 부채질을 했다. 눈이 좀 아파서, 그냥 엎드려 있었어.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대답에, 이쪽에서도 뜻하지 않게 한 박자 늦게 어, 어어, 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역시 불편하다. 별달리 맺힌 것도, 맺힐 일도 없었건만 왜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건지. 다시 무거워진 공기에 스바루는 멋쩍게 말을 꺼냈다.
"그… 집에 갈 거지? 같이 갈래?"
"…."
"어차피 교실 문도 잠가야 할 테고…."
"그래."
의외로 쉽게 수긍하더니 가방도 없는 눈치인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 쪽으로 걸어온다. 칠판 앞에 놓여있던 열쇠로 문을 잠근 뒤 나란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답례제, 잘 했어?"
"…응. 뭐, 그 사람에게는 어차피 잘해줄 마음도 없긴 했지만."
"아쉬운 표정인데. 난 부활동 선배 배웅해주고 왔어. 치~쨩… 아니, 모리사와 선배. 알지? 유성대의. 예상은 했지만 역시 엄청 시끄러웠다니까~"
"……야."
"응? 제대로 못 들었어."
"기인 형들 때문에 우울한 거야. 그 인간 때문이 아니라."
"…아아."
기인. 스바루는 이제서야 줄곧 나츠메에게서 느껴온 낯선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사카사키 나츠메는 오기인의 막내였다. 말이 좋아 막내지, 사실은 마지막 희생양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잘은 모르지만 일전에 '피네'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같은 유닛의 삼 학년보다는 기인 선배들이 더 의지가 되었던 건 당연한 일이리라, 고 스바루는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취급을 받고, 다른 눈으로 보여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짧은 침묵을 틈타 잠깐이나마 그런 걸 생각하다가, 문득 일 년 전 자신의 모습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리고,
바루 군이라고 불러도 돼?
그 언젠가, 웅크리고 있던 저를 찾아와준 건 단지 트릭스타의 멤버들만은 아니었다고. 조금 더 높은 꿈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눈높이가 같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며 작아져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 왜 지금의 나보다도 더 상처를 입어버린 걸까.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간 침묵이 제게 내리꽂힐 것만 같아서, 스바루는 겨우겨우 다시 한 마디를 꺼냈다.
"뭘 그렇게 걱정해, 분명 최선을 다했을 거잖아."
"…."
"나 있지, 치쨩 부장이 졸업하면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마냥 기쁘기만 할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인사를 하고, 인사를 받는데, 너무 슬픈 거야. 그래도 치쨩 부장이 웃으면서 여느 때처럼 날 불러줘서,"
"…."
"진심으로 기뻤어. 나츠메 너도, 잘은 모르지만 분명… 그 사람들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 거야."
"…바루 군, 꽤나 나를 잘 안다는 듯이 말하네."
체념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돌아온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스바루의 쪽이었다. 그 말에 적의가 없었음을 깨달은 뒤에야, 겨우 어깨를 펴고,
그야, 아주 모르지도 않으니까.
라며 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나츠메는 말없이 웃을 뿐 더는 무엇을 묻지 않았다. 스바루 역시 아까보다는 편안해진 공기를 느끼며 걸음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숨 같은 한 마디가 둘 사이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대."
"…?"
"형들이 그러더라, 나는 세상 풍파 같은 거 모르고… 그냥 평범하게 활동만 했으면 했다고. 근데 그렇게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
"웃기지, 나는 그 사람들 덕에 여기 서있는 건데… 그래서, 울었어. 너처럼 어떻게든 웃으면서 배웅해줬어야 하는 건데, 애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결국 또 어리광이나 피운 거지. 애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떠들고 다녔는데, 내가 어린 애 같은 짓을 해버렸어."
"…나츠메."
"나 한심하지? 바루 군."
조금 앞서 걷는다 싶던 나츠메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스바루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가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네가 왜."
"…."
"너는 최선을 다한 거잖아. 어쨌든 도망치지 않고 버텼으면, 그래도 그 사람들의 호의는 저버리지 않은 거니까."
"…."
"그리고, 나는…."
오히려 고마워, 그렇게 돌아와줘서. 그때 나를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놀랐었어. 여태껏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말을 마친 스바루를 나츠메는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조금 웃었다. 날 기억하는 사람이 다 있네, 바루 군? 그리 날 서지 않은 반문에 스바루는 용기라도 얻은 듯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이제는 얘기해도 되려나? 나 사실은 트릭스타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엣, 진짜?"
"진짜라고 하면 소속시켜줄 거야?"
"홋케랑 다른 애들 의견도 들어봐야 하긴 하는데… 아마 반응이 나쁘진 않을 거야! 너는 실력도 좋고 노래도 잘하니ㄲ…"
"하하, 생각보다 꽤 본격적이네. 장난이야. 난 어차피 소라가 있어서 올해는 꼼짝없이 스위치에 묶인 몸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에에…? 스바루의 표정이 차츰 굳어가려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는 나츠메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부디 다가오는 봄에는, 이렇게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두 사람의 앞에는 학교 현관만이 남아있었다.
"난 이쪽으로 가야 돼. 넌 어느 쪽이야?"
"반대네. 난 여기야."
"아… 그래?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바루 군도."
"방학 잘 보내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저기, 있지."
응? 몸을 굽혀 신발을 갈아신던 스바루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나도 별명으로 불러주면 안돼? 나츠메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하지만 꽤나 반가운 발언에 스바루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게 뭐 있겠어, 나츠(夏)!"
"너무 대충 지었는데."
"그래도, 히다카 호쿠토는 홋케고 유우키 마코토는 웃키였으니까…?"
"아니야, 맘에 들어."
"진짜지? 다행이다."
잠깐 사이에 시무룩해졌다가 곧바로 다시 환히 웃어보인다. 텐션이 도무지 종을 잡을 수가 없어서, 바라보다가 무심코 피식 웃어버렸다. 고마워, 바루 군. 하지만 그 말만큼은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잠깐 답이 없다가, 이내 예의 웃음으로 답했다.
나도. 고마워, 나츠.
계절은 아직 꽃도 채 피어나지 못한 조심스러운 때였고,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리울 꽃을 떠나보낸 빈 가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봄은 싱숭생숭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설레는 계절이었다. 아직 비어있는 가지에 어떤 꽃이 피어날지, 또 어떤 우연과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고, 장담할 수 있는 것 또한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계절이었다. 이 문턱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여름도, 아마 더욱 특별하게 기억되리라. 분명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봄의 문턱에서, 차츰 바람이 따스해지는 삼 월의 어느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