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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썰 백업

Rachieh 2017. 1. 9. 15:04

1. 성야제 ver. 츠카사


지평선까지 하얗게 물든 세상은 밤이 깊도록 잠들지 않는다. 소년의 와인빛 머리칼 위에 가지런히 얹혀있는 짙은 남색의 모자와 그 아래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열망으로 빛나는 자수정을 닮은 두 눈동자가. 희게 수놓인 레이스 장식과 일렬로 달린 금색의 단추를 하얀 손이 간간이 매만진다. 예배당 안에 고요하게 울리는 노랫소리는 아름답다 못해 경건하고, 웅장하게 퍼지는 소년의 신념에 밤을 가로지르던 새들조차 지붕에 내려앉아 떠날 줄을 모른다.

소년의 손에 들려있는 가사집은 이미 사람의 손을 탈 대로 타 제법 너덜해졌으나 그 마음만은 꿈을 꾸듯 매 순간이 새롭고 눈동자에는 가득 들어찬 순수한 열정. 나의 죄마저 씻어내리려는 듯 이제 마냥 맑지만도 않은 그 목소리는 지평선부터 파르랗도록 울려퍼진다.


2. 그냥 슈미카 (+에이미카)


내 손끝에서 섬세하게 피어난 장미꽃잎이 아스라이 흩뿌려진다. 빈틈없이 짜인 검은색 레이스 베일 아래로는 창백하리만치 흰 얼굴과 서로 색이 다른 한 쌍의 보석안구가. 금혼식도 아닌, 사지 멀쩡한 산 사람들의 결합인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휘감은 비통한 극(劇)의 서막이 올랐다.

짓궂은 운명의 지팡이를 쥔 금발의 남자가 옅은 푸른색의 눈을 빛내며 웃고 오늘에서야 내 품을 떠나 온전한 한 송이의 흑장미로 피어난 너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다.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면서도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영원히 그저 나의 것으로 머무를 줄 알았던 카게히라, 나의 온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던 나의 카게히라. 붉다 못해 검게 그을려버린 색채의 근원은 내 심장이 퍼올리는 피에 있고 너의 죽어버린 청춘에 바치는 진혼곡은 이제 여기 없다.


3. 피스톨즈 AU 슈미카


이츠키 슈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다. 정원에 각색으로 피어난 꽃에서부터 앤틱 인형, 희고 긴 손끝으로 직접 자아낸 섬세한 프릴과 얼굴이 비칠 정도로 공들여 닦은 보석 브로치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심미안에 들어차는 것이라면 뭐든 닥치는 대로 수집해 장식장 안에 진열하는 것이었다. 그 심미안이라는 게 가끔은 엇나갈 때가 있어서, 수집 대상이 아닌 - 예를 들어 사람이라든가 - 것들마저 품에 가둬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때가 있다는 게 흠이었지만.

세계의 신을 자칭하는 그가 이끄는 성채의 이름이 아스가르드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불필요한 것, 아름답지 못한 것을 솎아내어 가장 걸출한 것만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세운다. 피로써 지배되고 피에 의해 뒤집히던 야만적인 시대는 지났다. 고귀하고, 고결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흠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의 망막에 새겨진 살상 현장은 병에 가까운 기벽을 낳았고 아이는 도시의 가장 높게 솟은 마천루 꼭대기에 앉아 손가락 하나만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제왕으로 자라났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선대부터 사용해온 낡아빠진 간판을 갈아치운 뒤 신들의 제국을 표방한 것은 모두 그의 뜻이었다.

지금, 그의 눈 아래에 둔 도시 한복판에서 결코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탁, 탁, 짧은 간격으로 집무용 테이블을 두드렸다. 초조한 기색이라고는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보라색 눈동자에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불야성이 오롯이 담긴다. 뒤이어 자로 잰 듯한 음성이 툭.


"어쩔 셈이지, 카게히라."


두 번째 손가락을 횃대 삼아 여유로이 올라서있던 까마귀가 화르르 날아올랐다. 명도를 최대한 낮춰놓은 조명 아래에서 노란색과 푸른색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허공에서 몇 차례 가벼이 날갯짓하던 까마귀는 지면을 향하더니 이내 모습을 감춰버린다.


"스승님이 할 질문은 아인 것 같은데."


같은 자리에는 짙은 청록색 머리칼에, 서로 색이 다른 두 눈을 가진 남자가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이지만 체격은 그런 대로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슈의 낯빛을 살피는가 싶던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와인잔을 살짝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건, 가지를 쳐내고 토양에서 배척한다… 그게 스승님 철칙 아이가?"
"…그건 그렇다만."
"이번에는 내사 한 발 빨랐던 기다. 그짝에서 다시 판을 키울라카는 기를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께."
"그래도 그런 식의 선전포고는 성급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해. 너는 실전 이외에는 써먹을 곳이 단 0.1 밀리미터도 없다고 몇 번을 말해줘야 알아들을 셈이지."
"그기는! …아이다. 미안타, 스승님."


이제 와 생각해도 머쓱한지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던 카게히라가 이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