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Spoiled
* 약 수위 암시 有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속 시원히 인정해버릴 걸 그랬다. 세상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모두 이 손에 들린 실 한 가닥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만 같던 내가 너의 앞에만 서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좋을지 말문조차 막혀버리던 그 막막함이, 묘하게 치밀어오르던 짜증이 너의 그 무구하도록 깨끗한 웃음 한 번에 더욱 묘한 감정으로 승화되어버리곤 하던 모호함이, 처음부터 사랑이었다고. 동정도 연민도 무엇도 아닌 그저 사랑이었노라고. 어쩌면 너도 나에게 같은 걸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그 한 마디 터놓고 해주는 게 뭐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는 빠르게 틈을 드러냈다. 마치 지난날 나와 그 누군가가 그러했듯, 그 아이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내 팔 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듯 그렇게. 다만 너는 그때의 그 눈빛과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내 안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양,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나의 앞에서 천천히 마음의 조각들을 풀어놓았다. 조율에 실패했으니, 어서 나를 살피고 하자를 보수해달라고.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길었던 어둠 속에서의 기다림은 끝나고 파괴적이기 짝이 없는 욕망만이 남았다. 연결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멀게 느껴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늘 어떤 식으로든 너와 나의 사이를 이어주고 있으리라 막연하게 믿어왔던 실을 너는 그 손으로 직접 끊어냈다. 조율에 실패한 건 내 쪽이었다. 실패작 인형에게 사람의 것처럼 살아서 뛰는 심장을 선물하다니, 그게 어떤 폭풍을 몰고 올지도 알지 못하고. 완벽한 계산 실수였다. 너의 신은 너에게 숨을 불어넣은 순간 죽었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두 눈동자가 아릿하게 일렁인다. 슬픔인지, 혹은 그 무엇인지 나는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나버린 인형의 일은 더 이상 내 몫일 수 없었기에.
안아줘.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에 미세하게 서린 물기도,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 속 확고함도, 더는 내 수중(手中)의 일이 아니었다. 너는 이제 나의 인형이 아니었고, 탓에 네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이제 온전히 너만의 것들이었다. 너의 세계에서 나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지휘하는 조물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객체가 되어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더욱, 숨을 쉬는 게 버거웠다. 이제 너와 나는 서로를 어떤 눈으로든 바라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흐린 시야를 비집고 네가 비척대며 걸어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습관처럼 손을 들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지만, 지금의 내가 일전의 나와 다르듯 지금의 너 역시도 마냥 어린 아이처럼 사람의 손길을 갈구하던 그 시절의 너와는 너무 많이 달라져있는 것을. 짙은 청록색 머리칼 위를 가로지르던 손이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너는 한 번 더 나에게 종용한다. 가만히 눈을 돌리는 나에게 원망을 보내지도, 무엇을 어찌 하지도 못하는 채로.
항상 해왔던 거, 해줘. 익숙하던 예의 말투가 아닌 또박하고 끝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단어들의 조합에 나는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놀라고 만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서도,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카게히라 미카의 외양에 다른 누군가의 의식이라도 깃든 것인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느린 한숨이 너의 귓가를 파고든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무너져내리고 만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면 좋으련만, 뒤로 넘어지며 받은 충격이 모두 내 몫이라는 것에서 이 순간 가장 절실했던 소망과의 괴리를 체감했다.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너의 눈 안을 바라보며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네가 인형을 탈출하는 것? 사람 대 사람이 되어 온전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것? 모두 아니었다. 인형으로서 사람의 영역을 침범한 너의 간청은 도통 본뜻을 읽을 수 없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인형으로서 한 말이라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늘 그래왔듯 치수를 재고, 행여 다친 곳이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곳은 없는지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여느때의 평화를 되찾으면 된다. 가장 문제는 사람으로서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였다. 사람의 요구사항과 인형의 요구사항은 필연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어엿한 인간으로 자라난 너는, 아니 적어도 인형으로서 뛰는 심장과 온기를 띤 채로 흐르는 피를 가지게 된 너라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끝부터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을 필시 너도 눈치챘으리라. 이미 글러버린 인형사의 말로(末路)였다. 자신의 피조물 하나 어찌 하지 못하고 갈피조차 못 잡은 채 헤매는 꼴이라니. 형편없이 무너진 채로 일어날 생각조차 않은 채 한참동안 입 밖으로 어떠한 말도 내지 않았다. 거절도, 승낙의 말도. 말 그대로 그 무엇도. 어떤 불벼락도 떨어지지 않는 흔치 않은 순간을 너는 좀더 오래 붙들고 싶은지 간간이 내 품을 파고들 뿐 더는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는다.
한때 날카로운 말로 매도되어왔던 두 눈동자가 소리없이 깜박이는 채로 몇십 분을 그렇게. 품에 안긴 너에게서 나는 말을 하지 않을 때의 마드모아젤과 같은 무기력함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녀가 생기를 띠고 움직일 때보다도 지금의 너에게서 더욱 활기참을 느끼는 모순을 경험했다. 동그란 정수리를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파멸이 머지않았다. 금이 간 실패작은 인형의 방식으로든 사람의 방식으로든 끝내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물론 그 곁에는 인형사로서 최악의 끝을 맞는 나도 함께겠지만.
망가트려줘. 실없이 헤실대고 다니지 말라고 수도 없이 일러줘도 기어이 내 앞에만 서면 짓곤 했던 그 표정으로, 그러나 내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던 그 표정으로 네가 웃는다. 웃는 얼굴로 내 심장에 비수를 꽂는다. 인형사로서의 임종을 고한다. 그 모습에서 나는 사람이 되어 나풀거리며 내 품을 떠나간 언젠가의 붉은 눈을 가진 토끼를 닮은 아이를 떠올렸다. 내가 사랑한 인형들은 결국 이런 식으로 나를 죽이고 마는구나.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떠오른다. 나는 지금껏 서큐버스를 키워왔던 걸까. 너의 머리 위에 멈춰있던 손이 느린 동작으로 네 등을 쓸어내린다.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재질과 디자인을 한, 처음 너에게 입혀준 지도 벌써 2년이 넘어가는 재킷의 감촉이 유달리 까끌하고 낯설다. 깃털로 만든 귀걸이를 지나, 검은 앞판에 적자색 리본을 꽉 죄게끔 둘러 만든 목장식에 이르기까지, 표정도 감정도 잃어버린 눈과 손으로 천천히 훑어내렸다.
볼품없이 고장난 걸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제대로 망가트려줘. 인형으로서는 실격이 되더라도 사람으로서는 어떻게든 살아가볼게. 저답지 못한 말들을, 이츠키 슈의 인형에게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언사를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입술을 무작정 막고 들었다. 무방비하게 뜨고 있던 두 눈을 통해 자신의 신이 무너지는 순간을 여과없이 목격하는 것으로 너는 충분히 벌을 받았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끝끝내 몸을 집어삼킬 정도의 화력을 갖게 되어버린 욕망을 감당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몸이, 체온이, 시공간이 차츰 얽혀들어간다. 뛰는 심장은 거짓을 모르고 너의 지독한 외사랑은 기다림을 모르고 나의 처절한 갈망은 멈출 줄을 모른다. 줄을 놓쳐버린 인형사와 줄을 끊어버린 인형이 한데 뒤엉켜 바닥도 없는 나락으로 치닫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