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이단의 기도
Rachieh
2019. 1. 24. 13:36
#슈미카_전력
13차 전력 주제 : 동경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 TR님 (@tezza0810) 의 썰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소중한 썰로 연성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본 글은 사망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종교 시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모시던 신은 철창 안에 갇혀있었다고 한다. 비유적 표현인지, 혹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산 자들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쓴웃음과 함께 '그날'을 추억하곤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인지 입증할 방도는 없지만, 스스로를 교단의 성가대장이었다 칭한 이가 직접 풀어낸 진술에 따르면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
어느새 창 밖에서는 노을이 핏빛으로 타고 있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아무도 없는 기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혹여 청소를 할 만한 곳이 남아있지 않은지 목을 빼고 조심히 둘러보아도 이렇다 할 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오늘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아두라는 지시가 있었겠지, 그래야만 신이 노하지 않으시니까. 카게히라는 제단을 바라보며 놓여있는 의자들 중 가장 뒷줄에 앉았다.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성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신을 믿는가, 누군가 카게히라에게 그리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일 터였으나 그가 처음부터 이토록 독실한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제가 자라온 고아원이 이 교구에 통합되기 전까지, 신이라는 존재가 누구이며 기도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전부 이곳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배운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의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맨 처음 저희들의 신을 목도한 것은 카게히라가 열두 살 되던 해의 봄이었다. 신이 있다면 우리는 버려지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고아원의 고참 되는 아이만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카게히라에게 별안간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스스로를 열다섯 살, 니토 나즈나라고 소개한 그는 멋모르고 저를 신이라 부르며 붙드는 카게히라를 바라보면서,
— 아하하, 미카 칭. 나는 신이 아니야. 우리의 신은 이렇게… 음… 가까운 곳에 계시지 않단다? 물론, 저쪽 기도실에 가면 언제든 만나뵙고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 으응…. 글나.
— 우리 같은 인간들은 그분을 섬기는 입장이니까, 저마다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럼 그분도 기뻐해주실 테고.
이렇게 답해주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저토록 입성이 바르고 상냥한 사람이 모시는 신이라니, 필시 좋은 분이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니토는 카게히라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날마다 단정하게 옷을 입혀서는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기도실에 드나들었다. 그러는 동안 카게히라는 오가는 길을 작은 머릿속에 열심히 새겨넣었다. 언젠가 혼자서도 올 수 있게끔, 보호자가 없이도 이곳에 들러 그분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하루가 멀도록 내리던 눈이 서서히 멎고, 응달에 생긴 얼음조차 차츰 녹아갈 즈음에야 비로소 숙소에서 기도실까지 가는 길을 익힐 수 있었다. 카게히라는 곧장 홀로 길을 나섰다.
어쩐 일인지 기도실 안은 잠잠했다. 다들 낮에 미리 다녀간 걸까, 조심히 문을 밀어젖히고 내부를 둘러보았으나 텅 빈 본당에는 여느 때처럼 빈 의자만 줄지어 있을 뿐이었다. 제단에는 그분 - 저희가 신이라 부르는 - 의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그 아래에는 斎宮, 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이츠키라고 읽는다 했으나, 대부분 신이라고 부른다고, 니토에게서 전해들은 기억이 났다. 초상화가 담고 있는 것은 날카롭지만 유려한 선을 간직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을 닮은 색의 머리칼과 보라색 눈. 순간 카게히라는 제 발이 저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포도맛 사탕을 꾹 쥐었다. 평소에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 이후로는 입에도 못 대게 될 것만 같았다. 한참동안 넋 놓고 초상화를 바라보던 카게히라가 뒤늦게 본분을 깨닫고는 기도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늘 붐비던 곳에 제 몫의 발소리만 울려퍼지자 어딘지 기묘한 마음이 들었다. 기도실의 문을 닫고 꿇어앉자 한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미천한 신도가 신 앞에 기도를 올리오니…."
어느 정도 외웠다고 생각했던 기도문이, 목구멍에 걸려 좀처럼 그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분명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도 외우고 있었는데, 분하기보다는 서러운 생각에 몇 번씩 같은 구절을 반복하자니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면 되었다는 게야. 노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조심히 돌아가거라."
"……예? 신 님?"
"신에게 기도를 올렸으니 신이 답해주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네가 날마다 기도실을 청소하는 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긴장하여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일 테지, 이해한다."
본래 기도란, 그러니까 신에게 올리는 기도라는 것은 회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친형처럼 카게히라가 잘 따르게 된 니토도 그리 말했었다. 그분께서는 먼 곳에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것도 날마다 들르던 기도실에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카게히라는 무심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신의 앞에서는 결례가 될 것만 같았기에. 그토록 허둥대는 것을 그새 꿰뚫어보기라도 하신 것인지, 이번에는 너머에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모양이구나. 신탁은 처음인가 보군."
"그… 그기,"
"괜찮다. 그보다는 날이 저물어가니 서둘러 돌아가보는 게 어떻지."
"아… 알겠심더, 감사합니데이…."
어떻게 기도실의 문을 닫고 나왔는지도 모를 만큼 카게히라는 혼비백산한 채로 본당을 빠져나왔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성가대 연습을 하러 간 니토를 기다릴 겸 건물 근처에서 서성대던 찰나, 길고 가느다란, 허나 어딘가 묵직한 느낌을 주는 인영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순간 카게히라는 저도 모른 채 헉, 하고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초상화 속에서 닳도록 보았던 얼굴이다. 그렇다는 건, 불과 조금 전 자신의 기도에 답을 돌려주었던 - 신이라는 뜻이었다. 본래 초상화란 아주 오래 전의 모습을 그려두는 게 아니었던가. 그림 속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오히려 바로 이 순간의 얼굴을 그렸다 해도 믿을 것만 같은 자태에 눈앞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 걸까, 하기야 그러니까 신일 테지만. 온갖 생각들을 뒤로 한 채 급하게 창문 밑으로 몸을 숨기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카 칭? 여기서 뭐해?"
"응아앗, 나즈나 형. 저기… 신 님이…."
"응, 지금쯤이면 본당도 문을 닫고…. 신 님도 하루를 마무리하실 시간이니까."
"…응…."
"처음이라 놀랐나 보구나, 곧 있으면 익숙해질 거야. 우리도 슬슬 저녁 먹으러 가자?"
"응. 인자 들어가야제."
니토에게 한쪽 손을 붙들린 채 걷기 시작했을 즈음, 건물 쪽을 얼핏 돌아보았으나 제 눈에 보였던 인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꼭 오늘 들었던 목소리도, 제가 보았던 옆 얼굴도 모두 환상인 것만 같아서 카게히라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니토의 손을 한층 꾹 맞잡았다. 머지않아 저의 작은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때의 이야기였다.
며칠째 언론사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간 알지 못했던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성직자들 여럿을 연행해갔다. 저희들이 마음을 다해 모셔온 종교가 한갓 이단이라며. 성가대의 단장이었던 니토는 잡혀있던 연습을 취소하고 밤낮으로 보육원의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른 노릇을 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에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카게히라는 니토가 바삐 움직이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몰래 본당으로 걸음했다.
"신 님."
"어쩐 일이지? 카게히라."
"나즈나 형이, 억수로 바빠졌어예. 인자 옛날처럼 다른 아들을 보면서 웃지도 않구…. 그리고 밖에서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배를 집전하던 분들을 여럿 잡아갔심더."
"…올 것이 온 모양이구나."
"…?"
"카게히라, 니토를 탓하지 말거라. 그 밖의 모든 이들에 대해서도…. 화살을 돌려서는 안돼."
"…."
"곧 모든 게 끝날 터이니."
그 순간 카게히라는 요즘들어 본당에 오가는 걸음들이 뜸했던 걸 떠올렸다. 신에게 기도를 바친다던 이들이 어째서 하루 아침에 속세의 앞가림에 목을 매게 되었나. 게다가 바깥 세상에 관한 일이라면 신께서 가장 경멸하시는 화제가 아니던가. 먼저 가있으라던 니토도, 신이라면 새벽녘에 찾아뵙겠다던 아오바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새 카게히라는 신을 모시는 유일한 신도가 되어있었다. 성직자들이 집전하던 예배를 대신하려 어깨 너머로 외운 기도문을 읊으려 들면, 벽 너머에서 신이 작게 웃었다. 그런 건 되었으니 네 한 몸 피신시킬 곳이라도 찾아두라며. 숙소에도 제법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은 채 기도실에서 먹고 자던 카게히라는 의아하게 답했다. 여기로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가 방을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 그럭저럭 안심이었다.
낮에는 본당을 청소하고, 밤이 되면 기도실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고백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여느 때처럼 잠자코 듣고 있던 신이 기도가 끝나자 회답을 돌려주었다.
"분한 모양이구나, 너는."
"분하지 않은 게 이상한 깁니다. 신 님은 어디도 가지 않고 여기 있는데, 하루 아침에 다들 변해버려서는…. 게다가 신께서는 사람들을 탓하지 말라 하시니…. 아, 그렇다고 신께 화살을 돌리는 건 아니구예…."
"때로는 전능한 존재가 힘을 잃을 때도 있다는 게야. 이렇게 말하면, 네 마음이 조금 나아지려냐."
"…잘 모르겠어예. 오늘은 나즈나 형이랑 다투기도 했구…."
"니토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해는 진즉에 졌을 터였으나, 창 밖에서는 붉은 기운이 가실 줄을 몰랐다. 꼭 무언가를 태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동안 일렁이는 모양새를 잠자코 바라보던 카게히라가 주먹을 꾹 쥐며 말을 골랐다. 거짓말쟁이. 그런 원색적인 비난밖에 튀어나오지 않는 게 원망스러웠으나 달리 방도도 없을 듯했다. 니토는 오후에 쫓겨가듯 이곳을 떠났다. 급하게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서던 니토의 사물함에는 성가와 기도문이 실린 책자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책자를 들고 급하게 그를 좇았을 때는 일전에 보지 못했던, 낯설도록 냉정한 눈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즈나 형, 어데 가는 기가!
— 미카 칭…. 아직도 모르는 거야?
— 내는 모르겠다, 설령 안다캐도 신 님 옆에 남아있을 거데이.
— 미카 칭, 그분은,
— ….
— 신이… 아니야.
말을 고르는 듯한 무거운 침묵 뒤에 따라나온 것은 성가대장이었던 사람의 고백이었다. 그분께서 신이 아니라니, 틀림없이 바깥의 이야기를 듣고 왔을 테지.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족족 타고 남은 재처럼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카게히라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니토의 손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붙들었다.
— 그기 무슨 말이가? 적어도 알아듣게 설명이라도 해도!
— 너도 봤지? 본당에 걸려있는 초상화 말이야.
— …응.
— 그게, 삼백 년 전 그림이래. 우리는 불과 지난주에도 그분을 봤잖아? 바로 전날 찍힌 사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어! 미카 칭은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 이츠키 님은, 신이잖나! 불가능한 건 없데이!
— 나도… 나도 차라리 그렇게만 믿고 싶어.
카게히라가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떨궜으나 둘 중 어느 하나도 주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꽃샘추위라기에는 이상할 만큼 스산한 바람이 둘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눈치로 입술을 달싹이던 니토가 가까스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 내 말을 잘 들어줘, 미카 칭. 그분은…. 인간이었던 거야. 우리와 같은.
— 나즈나 형….
— 바깥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어쩌면 미카 칭이 왔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는 다른 신이 있대. 우리는 지금껏 이단을 모셔온 거야. 그분은…. 인간임에도 착취를 당해온 거고. 생각해봐, 삼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이를 먹지도 죽지도 못했을 삶을. 나는, 더 이상 이런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교단의 윗사람들도 전부 타락한 지 오래고, 다들 이츠키 님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어….
니토는 추위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작게 몸을 떨더니 책자를 주워 카게히라에게 건넸다. 카게히라는 멍하게 그걸 받아들었다.
— 나는 가볼게. …혹시 마음이 바뀌거든, 내일 오전 안에 숙소로 와줘.
— ….
— 정 안되더라도, 몸이라도 피했으면 좋겠어. 나는 카게히라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부디 건강하게 지내줘.
말을 마친 그가 캐리어를 끌고 저만치 사라져가는 모양새를 카게히라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문 모를 눈물이 흘렀으나 분해서 울음이 나는 것인지 버팀목이 사라졌다는 서운함 탓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막아야 할 것 같았어예. 나즈나 형은, 성가대의 단장이기도 했구, 중요한 사람이니까…. 근데 이래 가버려서…."
"이제 정말로 너만 남았구나."
"막지 못해서, 죄송합니더."
"네 잘못은 없다는 게야. 그리고 말은 편하게 해다오, 신탁이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게야."
"…이츠키 님은, 참말로…. 사람인, 기가?"
난생 처음 내뱉는 어절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앙상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상대가, 제가 날마다 정성스러운 기도를 바치곤 했던 이가, 저와 같은 인간이라니. 기도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자니, 상대편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자그만 공간의 문이 열리고, 새하얗고 깡마른 손이 저를 향해 뻗쳐오는 게 보였다.
"…!"
"손을 잡거라, 이곳은 밤을 보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내가 지내던 곳으로 가자꾸나."
"그럴 수는…. 없데이, 이츠키 님이 내랑 같을 수가 있나."
"니토의 말도 믿지 않더니 내 말도 믿지 않겠다는 건가."
"…."
"서둘러다오, 곧 있으면 사람들이 들이닥칠 게다. 본당은 위험하다는 게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조차 한치의 흔들림 없는 보라색 눈동자가 제게 말을 걸어왔다. 카게히라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츠키의 손을 붙잡았고, 가느다란 몸과 상반되는 악력에 이끌려 곧장 본당을 나섰다. 등 뒤에서는 수백 년이 흐르도록 잠들지 못한 이츠키의 초상화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그림 속 이츠키의 눈을 피한 카게히라가 그에게 손목을 붙들려 한참 내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사제관이었다.
"하루쯤 몸을 피할 정도는 될 게다."
"그라모, 그 다음은 우째 되는 기가…?"
"너는 도망치거라. 나는… 이곳에 남지."
"나즈나 형이 여기 계속 있다가는 다친다캤다!"
들어다오, 카게히라. 울먹이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이츠키가 어린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삼백여 년 전에, 신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깥의 사람들이 믿는 신은 저희의 교리와 동떨어져있었기에, 이들은 아무도 찾지 못할 조용하고 외진 땅에 자리를 잡았다. 제일 먼저 교회 건물을 짓고, 그 다음으로 학교와 주거 시설을 들여놓았다. 본당의 한가운데에는 신을 대신할 존재 - 어느 귀족의 자제였던 도련님을 앉히기로 했다. 그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 가족에게서 영영 분리시킨 이들은 그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아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차라리 세뇌에 가까웠던 기억 탓에 소년 - 이라고 불렸어야 할 사람 - 의 시간은 영영 멈추고 말았다. 육체의 시간은 더는 흐르지 않았고, 이따금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곤 했던 손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에 가로막혔으며, 적어도 음악 수업을 들을 때만큼은 반짝이던 두 눈 역시 광신도들의 쌓여가는 염원과 함께 빛을 잃었다. 그렇게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채로 살아온 끝에, 살아있는 신이 되었을지언정 끝조차 아닌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제 운명일 테지, 무너진 종교 집단과 함께 죽어가는 것.
자조하며 말을 마친 이츠키는 카게히라가 제 손을 꼭 붙들고 있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날마다 제단을 말끔히 정리하고 성가대의 맨 앞줄에서 노래를 부르던 이도 진실을 알고는 떠나갔다. 그를 포함해 제게 등을 돌린 사람들을 탓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츠키조차 자신의 편인 적이 없었으니. 허나 모든 게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한 지금도, 제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 카게히라에게 마음이 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이곳에 오던 날부터, 조금 낯을 가렸을 뿐 항상 저에게 있어서만은 신실했는데. 날마다 본당을 청소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해가 질 무렵이면 꼭 기도실에 들르고…. 천천히 되짚자니 노란색과 푸른색의, 빛깔도 서로 다른 눈동자가 처연하게 제 눈을 좇았다. 이츠키는 말없이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세례도 무엇도 아닌, 온전한 감사를 담아.
"혼자인 것보다는 훨 낫구나. 단, 눈에 띄지 않게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이라면 알고 있으니,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리거든…."
"내는 안 갈 기다."
"카게히라."
"내는, 이츠키 님을 두고는 어디도 몬 간다 아이가. 제발, 같이 있게 해도…."
"나는 인간임에도 지금껏 인간으로 살지 못했다. 설령 네가 일을 당한다 해도 나는 살아서 지옥을 헤매야만 해. 차라리 네가 다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라도 가질 수 있게, 부디 도망쳐다오."
죽어도 죽지 못하는 이의 부탁이었다. 카게히라는 저의 신이 눈물을 떨구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있는 힘껏 고개를 내저었으나 눈앞의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지 않겠노라고, 그럴 수는 없다고 핏빛 울음을 토해내는 카게히라를 이츠키는 절망에 물든 눈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제가 이곳에서 잠들고자 한다면, 전능한 신은 살아서 오롯이 고통 받아야 할 테다. 끝없는 어둠 속을 홀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걸어나가겠지. 다만 함께 살아서 나가는 것 역시 지금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이 붉었다. 필시 폭도들의 횃불이리라, 짐작하기 무섭게 옆 건물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위층에서 초상화를 불태우자는 고성이 귓가를 때리자 카게히라가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츠키 님, 안 들리나? 저들이, 살아있는 사람의 초상화를…!"
"카게히라, 지금은 위험하다는 게야! 적어도 폭동이 가라앉은 후에 나가거라!"
"그래도…! 저 사람들 여까지 들어오면, 이츠키 님은 우째 될지도 모르는 기라!"
"어차피 저들은 나를 죽이지 못해."
카게히라가 문을 열려 들었으나 이츠키가 저지하는 게 한 발 빨랐다. 귓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게, 폭동의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인지 의식이 차츰 현실로부터 유리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카게히라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이츠키가 다른 손에 쥔 단도를 내밀었다. 한참 의중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던 카게히라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이츠키 님."
"나를… 내 존재를 끝낼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카게히라."
"내는, 내는 몬한다…."
"부탁하마. 나는 너무도 긴 세월을 깎여왔어."
"…."
"나를 시간 안에 가둬둔 것이 사람들의 믿음이었으니, 나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도 누군가의 믿음이겠지. 이제는 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야. 저들은 남아있는 신도를 찾는 중이니, 늦더라도 필시 너를 끌어내 화형에 처할 테다. 네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폐허를 헤매이는 수밖에 없어. 적어도 너와 함께…. 길었던 고독을 끝맺게 해주겠나."
신조차 어찌하지 못한 죽음의 색채에 유일하게 남은 신도가 몸부림쳤다. 눈물이 칼날을 적셨고 석양보다 붉은 피가 세례처럼 흩뿌려졌을 때에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었다. 사순의 성가도, 비통한 울음 소리도 없었다. 카게히라는 쓰러진 이츠키의 이마에 입술을 내린 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 심장에 칼을 꽂아넣었다. 마지막까지 기도문을 내뱉던 입술의 떨림조차 멎었을 적에 폭도들이 던진 화염병이 사제관의 창문을 부수었다. 끌 사람이 없었기에 가재도구에 붙은 불은 빠르게 번졌고 뒤이어 한데 눈을 감은 신과 마지막 신도의 육신이 불길에 휩싸였다. 피보다도 붉은 화염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끝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건물 터에서는 유골이라고 할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은으로 만들어진 단도만이 어렴풋이 비극을 상기시킬 따름이었다.
그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니토가 다시 그 자리에 걸음했을 때는 이미 무엇에 쓰이게 될지도 알지 못하는 건물이 높아가기 시작한 뒤였으며 그날의 일을 떠올릴 만한 것은 티끌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천국에 당도했을까, 혹은…. 유일하게 끝까지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제 앞으로 돌아온, 신의 단도를 사제관이 있던 곳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한때 사람의 영혼조차 뒤흔들던 이단의 기록은 정말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신이라 불리며 추앙되었던, 끝끝내 인간이 되어 죽고자 했던 남자도. 그의 마지막 신도도, 전부. 이제는 아득한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기도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낮게 읊조린 니토가 느리게 등을 돌렸다. 이단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이 갇혀살았던 철창이 부서지는 소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젠가 깃들 태동이기도 할. 옛것은 옛것으로, 잊혀가는 것이 섭리인 줄을 알지만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결백하게, 또한 강인하게 피어날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기에.
노을이 핏빛으로 타고 있었다.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의 불길을 빼닮아,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는 석양이다. 시간은 다시 역사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경을 담은 신앙의 펜과 세상 끝 사랑의 잉크로 쓰인, 다만 언제까지나 무결하게 회자될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