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악마 공작으로 산 지 200년, 할로윈에 웬 인간 아이에게 청혼을 받아버렸습니다?!
#슈미카_전력
43차 전력 주제 : 대저택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머지않아 시작이다.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속세의 지긋지긋한 풍습이.
이츠키 슈는 마뜩찮은 얼굴로 벽시계를 곁눈질하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암막 커튼으로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가려두니 한결 낫다. 집 앞의 장미 넝쿨은 손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굳이 넘으려 들어봤자 다치는 건 제가 아니니까. 멀리서 아스라하게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제일 구석진 이곳까지 걸음한 걸 보면 동네 패거리 중에서도 꽤나 연장자 축에 속하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또 어떤 추태로 하루 늦은 생일선물을 안겨주려나. 손은 조금도 대지 않고 구경할 수 있는 오락거리가 되어버린 할로윈의 풍경이 어느 정도는 즐거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쯤은.
마을의 서쪽, 가장 외진 곳에 지어진 저택에는 악마 공작이 살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세간에는 그런 소문이 도는 듯했다. 지지 않는 벚꽃처럼 사철 분홍색을 띠는 머리칼에, 죽음의 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보랏빛의 눈동자. 밖으로 걸음하는 일도 적을 뿐더러 이따금 들리는 목격담에 따르면 나이도 먹지 않는 것 같다나. 본래 소문이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이는 먼지로도 몸집을 불리기 마련이라, 마지막으로 마을에 걸음했을 때는 공작이 사람의 심장을 노린다는 말까지 퍼진 뒤였다.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짙은 보라색의 - 깃털이 달린 모자를 눌러쓴 채 유유히 암시장을 빠져나오던 남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연유야 어찌 되었든 괴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로 이따금 재미 삼아 꽃으로 된 요새를 넘어오거나 저택 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꼬마 녀석들의 치기 어린 장난이 줄어든 건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티 타임만이라도 여유로이 즐길 수 있었으니. 단 하루, 시월의 마지막 날만 제외하면. 찻잔 손잡이를 느리게 두드리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어김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커튼도 미리 쳐두었겠다, 바람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눈이라도 붙이면 좋으련만 오늘만큼은 그리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츠키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낡은 계단이 삐걱거리며 여과 없이 세월을 말해주었다. 예년 같았더라면 지금쯤 집 안에 있는 숨이 붙은 것들은 모조리 불러낼 기세로 초인종이 울렸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잠잠한 것마저 심기를 거스른다.
"흥, 보나마나 할로윈인지 뭔지에 놀아난 속물이겠지."
여전히, 썩 유쾌하지 못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어젖혔을 때 마주한 것은 어째서인지 의기양양한 표정도, 그렇다고 이 쓰러져가는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도 아닌, 순전히 겁에 질린 얼굴을 한 소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햇빛을 받으면 - 이 구석진 숲 어귀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 - 밝게 빛날 듯 짙은 초록색의 머리칼과 의외로 평범한 옷차림, 허나 대번에 시선을 잡아끄는 노랗고 푸른 두 눈동자. 꼭 유리구슬 같은 그 빛깔에 이츠키는 잠깐동안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봤자 일회용 분장이겠지, 짧게 숨을 고른 뒤 비딱하게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 굳이 듣지 않아도 빤하다만."
"트… Trick or trick?"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여기까지는 무슨 수로 걸어왔나 싶다. 언뜻 보기에도 썩 대담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기에 분명 벌칙에라도 걸린 모양인데, 이렇게나 떨어서야. 장난 혹은 대접도 아니고, 장난 아니면 장난이라니. 한데 아쉽게도 일 년 내도록 인간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장본인은 시덥지 못한 장난 따위에는 흥미가 없는 관계로, 적당히 사탕이나 줘서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인데예,"
"…?"
"결혼해주이소!"
"하?"
이것이 이백 년간 속세와 동떨어진 대저택에서 살아온 악마공작 이츠키 슈가 인간에게서 들은 가장 긴 문장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떨어진 제안 - 그것도 청혼 - 에 이츠키는 순간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서고 말았다. 이것도 벌칙의 일환인가, 그렇다면 크로와상이라도 구워서 내줘야겠군…. 이런 외진 곳에서 폐쇄적인 집 주인과 나란히 식탁에 앉을 담력이 된다면 말이지만.
"방금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피차 피곤해질 테니."
"응아앗…."
"어쨌든 여기까지 온 수고는 치하한다는 거다. 사탕을 줄 테니 괜찮다면 들어오도록. 해칠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거라. …정 불안하거든 현관문은 열어두어도 좋다는 게야."
왜 제가 저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저택의 현관과 주인의 얼굴을 번갈아 담고 있던 두 눈동자에 비로소 안심의 기색이 비쳤다. 사탕이 필요하다면 그 눈에서 색을 추출하면 될 텐데, 그런 농담이 떠오를 만큼 선명하고 아름다운 눈이다. 인간에게도 저런 눈이 있었던가, 이제는 아득한 얼굴을 되짚는 것은 사치임을 알고 있다.
"그라모…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하게 현관문까지 닫아둔 소년이 신발을 벗어들고는 제 뒤를 따랐다. 얼굴이 비칠 만큼 깨끗하게 닦인 바닥 위로 조심스러운 걸음을 딛어나간다. 이츠키는 찬장으로 손을 뻗어 이따금 두어 개씩 꺼내먹곤 했던 사탕 상자를 열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곧장 소년이 들고 있던 사탕 주머니에 담아주고 조금 전 티 타임을 위해 구워두었던 빵도 구석에 넣자 화들짝 놀란 시선이 저를 향했다.
"응앗, 이래 많이는… 필요 없는데예."
"말은 편하게 해도 좋아. 그리고 이건, 어차피 인간 아이들을 많이 상대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미리 네 녀석에게 다 줘버리는 거다. 네가 이번 사윈에 첫 번째로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에 감사하도록."
"으응…. 역시 악마 공작 씨는 악마였던 기가."
"이미 다 알고 온 게 아니었더냐, 새삼 몰랐던 척을."
"그기, 마을에서는 지금도 억수로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공작 씨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캐서 마음이 쓰였데이. 사람들이랑 섞이지 못하는 기 안타깝기도 했구."
"네 동정은 필요 없다. 용건이 끝났으면…."
돌아서려는 순간 상대가 다급하게 팔을 뻗었다. 또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앞서는 시선은 이번에도 썩 곱지 않았다. 이래서 인간 아이를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우선 마을로 돌려보내고 나면 장미를 좀 더 촘촘하게 심어볼까…. 그런 생각이 가지를 뻗을 틈도 없이,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내는 용건 아직 안 끝났데이."
"그래, 이번엔 뭔가."
"내랑… 결혼해도, 공작 씨."
이 아이는, 아무래도 할로윈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굳이 겁을 줘서 돌려보낼 뜻은 없었으나, 이쯤 되면 할로윈이 마을 외곽에 살고 있는 독거 이웃을 찾아다니며 시덥잖은 장난을 거는 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만 같았다. 한데 처음의 겁에 질려있던 표정과는 다르게 어딘지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저 얼굴은 농담을 하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자, 우선 확실히 해두지….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라는 게야."
"내, 내도 그건 알고 있데이…? 진심으로 공작 씨랑 결혼하고 싶은데 그건 안되는 기가?"
"대체 왜 초면인 나와 결혼을 하겠다는 거지, 너는."
"그기…. 잘생겼잖나."
어떻게 봐도 오늘은 잘못 걸린 듯하다. 자신이든, 아니면 이 아이든. 그러고 보면 맨 처음부터 Trick or trick, 같은 비문을 썼던가. 정 바란다면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어쩌면 오늘 문을 열어준 게 훗날의 제게 있어 꽤 좋은 안주거리가 되리라는 걸 예감하며, 이츠키는 기나긴 복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 좋다…. 단 구색을 맞춰주는 건 오늘 하루만이라는 게야."
"…."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다. 밖은 공기가 차니까, 난로가에서 잠깐 쉬자꾸나."
그제야 잔잔한 수면에 잉크를 푼 듯 새하얀 소년의 얼굴 위로 미소가 퍼져나갔다. 이날의 갑작스러운 선택이 두 사람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는, 양쪽 다 꿈에도 모르던 때의 일이었다.
집 한 번 억수로 크데이, 근데 의외로 거미줄도 하나 없구…. 바닥 청소도 다 직접 하는 기가? 근데 공작 씨는 이름이 뭐꼬? 한참동안 갖가지 의문점을 풀어내던 소년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 보았다. 가장 근본적인 게 이제서야 궁금해진 모양이지, 이츠키는 무릎을 살짝 굽혀 시야를 맞춘 뒤 천천히 답해주었다.
"이츠키 슈. 결혼해달라고 하더니 이름을 물어볼 생각을 빨리도 하는구나."
"슈 씨구나…. 발음이 쪼매 어려운데 시이 씨라고 불러도 되나?"
"이츠키라고 부르거라. 그보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인간 꼬마."
"꼬마 아이구 형아다 안카나? 내는, 카게히라 미카라 칸데이."
"카게히라로 족하겠군. 그나저나, 할로윈인데 나가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괜찮겠냐는 거다."
직접 뜨개질이라도 한 것인지 많이 어설픈 솜씨의 사탕 주머니와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카게히라가 멋쩍게 웃었다. 동네 아들은 어제부터 사탕을 너무 마이 먹어가…. 이것까지 가져가믄 충치 생길 기다. 여전히 눈을 어디에 둘지 정하지 못한 눈치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순간 짧은 감탄을 내뱉기에, 시선을 따라가본 유리장 안에는 금발의 앤틱 인형이 얌전히 앉아있었다.
"인형 씨도 있었네. 공작 씨, 내 좀 더 자세히 봐도 되나?"
"뭐, 그렇게 하도록. 조심해서 들고 올라오거라, 나는 그동안 네 사탕 주머니를 새로 만들어줄 테니."
"응? 이거?"
"그래. 보아하니 돌아가는 길에라도 다 떨어트리기 십상이지 않느냐."
카게히라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리장 문을 열고 조심히 인형을 꺼내들었다. 녹색 유리 안구와 눈을 맞추더니 신기하다는 말이 멎을 줄을 몰랐다.
"에헤헤, 인형 씨는 이름이 뭐꼬?"
"…마드모아젤.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이라고 할 수는 없다만…. 계단이다, 발 밑을 살피도록 해."
"으응, 그래 가파르진 않으니까 괘안타."
이츠키의 개인 서재는 층계를 올라오면 곧장 보이는 가장 큰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메꾼 책장과 자그만 티 테이블, 집무용 책상이 있는.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넣고 돌아오니 카게히라는 테이블에 놓여있던 소형 티 세트에 눈을 빼앗긴 지 오래였다.
"이건 다 인형… 마드모아젤 씨 거가?"
"보는 그대로다. 차는 얼그레이로 괜찮겠냐는 게야."
"응, 고맙데이!"
물을 올려놓고 돌아오니 자그만 찻잔이며 주전자를 조심히 만지작대고 있다. 가지고 놀아도 좋다고 허락하자 제 손톱만한 손잡이가 신기한지 한참을 들여다보는 모양새에 이츠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떻게 봐도 어려보이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 아이들에게는 형이라고 자처했던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걸까. 아니, 오히려 어리지 않다고 가정했을 때 초면인 상대 - 그것도 마을에서 악명 높은 악마 공작 - 에게 난데없이 청혼을 해오는 게 더 모순적이다. 조명 아래에서는 머리칼이 빛을 받아 제 색을 띠고, 찬찬히 살펴보니 상당히 단정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신이 섬세하게 조각했다고 해도 믿을 것처럼. 오늘만을 위한 분장일 것이 뻔한, 호박과 청금석을 박아넣은 듯한 두 눈이 가짜라고 한다면 오히려 억울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인형이군, 무심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가 행여 그가 들었을까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이 집에 인형이라고는 외롭고도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뿐이건만, 제 속단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맞다, 아직 내 나이 안 가르쳐줬제? 내는 올해로 스무 살이데이."
"나이도 찼으니 장난은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네게도 들리다시피 바람이 거세다는 게야,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숲이 깊어질 게다."
"응?"
"숲 말이다, 밖에 있는. 날이 그리 어둡지 않아 용케 빠져나와서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만…. 안쪽은 보이는 것과는 또 달라서, 금세 길을 잃을지도 몰라."
"길을 잃으면, 우째 되나?"
카게히라가 처음으로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뜨며 제 몫의 찻잔을 소리 나게 떨어트렸다. 의외로 이런 화제에서 두려움을 감지하는 건가, 하기야 저토록 깊은 숲에 홀로 남겨지는 것만큼 달갑지 않은 일도 없겠지만. 답지 않게 대접만 했던 할로윈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심리였는지, 뒤늦은 장난을 구상하는 공작의 입꼬리가 조용히 말려올라갔다.
"그 정도도 숙지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가. 길을 잃으면, 물론 잡아먹히지."
"누구한테?"
"이 나에게."
어깨를 덮을 만큼 내려온 머리칼을 살짝 들어올리자 하얀 목이 드러난다. 이런 쪽의 취미는 없었으나 괜히 물려는 자세를 취하니 펄쩍 뛸 듯 놀라는 반응이 꽤 즐거웠다. 인간을 무는 건 내 분야가 아니라는 거다. 여유롭게 웃으며 종전의 소란을 일단락한 뒤에도 카게히라는 울 것처럼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잡아먹는 것까지 내 소관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쯤 했으니 슬슬 돌아…."
"그라모 내, 여서 하루만 재워도!"
"할로윈은 단 다섯 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게야!"
"내도 안데이, 그래도…."
한 팔로는 제 인형 아가씨를 소중하게 받쳐 안은 채로, 조용하던 일상을 뒤흔든 인간 아이가 말한다. 그 순간 이츠키는 제가 올 한 해 무엇을 잘못했는지 낱낱이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짚이는 게 없으니 - 그야 물론 일 년 내내 이 삐걱거리는 저택에 틀어박혀 산 탓이리라 - 신이 제게 가혹하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오늘 들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이츠키는 랜턴을 챙겼다.
"차를 다 마시거든 따라오거라. 하루 묵을 방을 안내해줄 테니."
"응앗, 참말로 내 재워주는 기가?"
"보아하니 네 녀석은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 거다. 이곳에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들도 많고, 전부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밤에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위험해."
"으응… 고맙데이. 내는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공작 씨 의외로 착한 사람이었구마."
"칫, 괜한 말을. 인간 아이가 이쪽 숲에 발을 들였다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전부 내 탓이 되어버리지 않느냐."
겉으로는 툭 던지듯 한 말이었으나 이츠키는 상당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의 파도와 맞서는 중이었다. 하기야 이 외진 곳에서 산 사람을, 그것도 저에게 호의적인 산 사람을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간 굳건히 지켜왔던 방어벽이 어느 정도 무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카게히라를 데리고 빈 방이 한가득인 복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제 방 바로 옆에 있는 침실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지내는 게 좋겠군. 친우들이 들를 때마다 쓰는 방이니 청소도 수시로 하고 있고, 인간들이 거북해하는 것들도 나름 적을 게야. 바로 오른쪽이 내 방이니, 필요한 게 있거든 찾아오도록."
"공작 씨, 친구도 있었나? 그라모 와 이런 날 불러서 같이 놀지 않구."
"할로윈이 이쪽에서는 나름의 명절이라는 거다. 복잡하게 되었지…. 피곤하지는 않은가?"
"응, 아직은 괘안타. 근데 있제, 내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
"무엇이지."
공작 씨 얘기가 듣고 싶데이. 눈을 빛내며 그리 말하기에, 저녁이 준비되면 부르겠다는 말과 함께 뒤를 돌자 다급하게 손을 뻗어온다.
"내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그냥… 궁금해가. 항상 만나고 싶기도 했었구."
"나를?"
"응. 어렸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안카나, 저짝 숲 깊은 곳에 다 쓰러져가는 대저택이 있다구…. 가까이 가는 사람은 다 사라지거나 안 좋은 일을 겪었다카데. 그래서 할로윈만 되믄, 이 집이 담력체험장이 되구. 아, 이건 공작 씨가 제일 잘 알겠지만, 암튼."
"…."
"그래도 내는 믿고 있었데이, 여기 살고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일 거라구."
"어째서, 카게히라."
공작 씨는 한 번도 못 봤겠지만, 마을 쪽에서 해 질 무렵에 창 밖을 보믄 이 저택의 창가만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안카나. 그래 빛날 정도로 창문을 닦구,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 예쁜 꽃들을 혼자서 다 길러내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기다…. 내는 그래 믿었데이. 한참 꿈이라도 꾸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카게히라가 문득 저를 돌아보았다.
"내 눈, 보이제?"
"…? 물론, 제대로 보인다만."
"이거, 분장이라구 생각했겠지만 진짜 내 눈이다 안카나. 이 눈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가끔 내를 악마 공작한테 보내버린다캤었다. 나 같은 아는 당신 같은 사람의 반려로나 어울린다카면서…. 그래서 더 공작 씨를 좋게 봐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제."
그 아이가 멋쩍게 웃는다. 그 순간 매일을 떨면서도 오늘만을 기다렸을 모습이,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존재의 삶에 뛰어들 결심을 내렸을 영혼이 무심코 안타까웠다. 그리고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아름다워서, 모조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아가 치밀었을 두 눈을 바라보며 성토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저 보석인 줄만, 혹은 어느 하늘에서 빛나던 별인 줄로만 알고 있었노라고.
자각이 돌아왔을 때는 까마득한 날 어디에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제 심장의 박동이 그리워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연민인가, 저도 모르는 새 이어져있었던 붉은 실인가. 필시 유한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리라고 생각하며 이츠키는 가벼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게히라는 여전히 제 소매 끝을 붙든 채였다.
뜻밖의 방문객이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는 모처럼 외롭지 않았다. 식기가 그릇에 부딪는 소리를 제외하면 소름이 돋을 만큼 잠잠하던 여느 때와 다르게, 카게히라의 이런저런 물음에 답을 해주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왜 이런 곳에서 홀로 살게 되었는지부터, 그 친우라는 이들은 누구인지. 세상에 태어나보니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로는 외관상 나이도 먹지 않고, 죽을 일도 없으며 누굴 사랑하더라도 결국은 세상에 홀로 남겨질 고독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종종 이쪽을 드나드는 마법사며 흡혈귀들과 벗이 되었다고도. 얼핏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으나 카게히라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까 보았던 마드모아젤… 그 인형도, 내가 한때 사랑하던 이를 본따 만든 것이다. 영생이란 가혹해서,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앗아가니까."
"…외로웠겠데이, 공작 씨도."
"나름 익숙해졌지만 말이지. 지루하지는 않았나?"
"응, 재밌었다 안카나."
"그렇다면 다행이군. 해서 카게히라, 정말로 돌아가지 않을 심산인가?"
"응?"
본디 세상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라는 것이 있었다. 정확히는 살아있는 사람과 산송장의 경계이든가. 말이 좋아 인간 아이들의 담력 체험 장소였지만, 숨이 붙어있는 존재가 오랫동안 머물러서 좋을 건 없었다. 제가 연민에 휩싸였다는 이유로 저 아이의 남은 생마저 담보하려 하는가. 한데 어째서인지 냉정하게 사고하기가 쉽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돌아갈 테니 남는 랜턴이 있거든 한 개만 달라고,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정을 준다 한들 어차피 곧 떠나가겠지. 인간들의 일생은 악마 공작에게 있어 너무도 짧기 그지없었다. 반짝이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가이없는 어둠이 찾아온다. 그걸 참고 견디는 것도, 딛고 일어난 후에 생을 이어가는 것도 온전히 저의 몫이다. 이츠키는 더 이상 자신이 없었다. 마음에, 유리장에 품어둔 인형은 하나로 족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필시 어딘가에서는 이어져있었던 인연일지도 모르는 것을,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에 어둑하게 자국이 패였다.
"아침이 되거든, 지도와 랜턴을 챙겨주마."
"…응."
"음식은 입에 맞았을지 궁금하구나."
"맛있었데이. 이런 음식을 날마다 먹는다니 부럽다…."
"이쪽의 것을 먹었다간 탈이 날 수도 있으니, 나름 인간들의 식단을 모방한 것이지만 말이다."
거짓말이었다. 숲에서만 나는 식재료가 있기는 하나 언제부터인가 인간들 틈에 섞여서 먹거리를 사오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기에. 그마저도 유일한 낙을 잃은 후로는 좀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으나, 바깥의 동전만은 여전히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버리지 못한 습관이었으며 두 눈에 맺힌 상이었다. 실은 이렇게, 바깥에서 또 누군가가 저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르지. 이런 날을 위해 인간들의 레시피를 구하고 밤의 시장을 들락거렸던 것인지도…. 식사를 마친 뒤에도 이츠키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식기 두 벌이 놓여있는 모습이 하릴없는 꿈 같아서, 손을 대면 깨어날 것만 같았다. 바라건대 조금만 더. 어떤 공상에 빠져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사윈의 하루는 그러는 사이에도 차츰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 나가는 길은 저쪽이니, 조심해서 가거라. 숲의 초입까지는 네가 걸어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가면 될 게다. 걷다가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보이거든, 그때부터 이 지도를 참고하면 돼.
— 내, 조심해서 가께.
— …그래. 공연히 길을 잃지 말도록.
— 신세 많이 졌데이, 공작 씨. 잘 지내래이.
제가 건네준 랜턴과 지도를 한 손에 들고, 카게히라가 멋쩍게 웃으며 남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스산한 바람이 정원에 핀 꽃들을 뒤흔들었고, 방문객은 걸음을 재촉하며 철문을 빠져나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일러주긴 했으나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뒤이어 철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닫히고, 카게히라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차츰 멀어져가는 걸 지켜보던 이츠키는 이내 말없이 돌아섰다. 티 테이블로 돌아오니 아침에 내려둔 얼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두 명분은 족히 나올 만한 분량이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잔에 따른 차를 마시며, 이제는 숲의 어느 길목을 걷고 있을 카게히라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에게 건네주겠다는 명목으로 만들고 있던 손가방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었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창 밖으로 눈길이 가는 탓에 결국 바늘을 내려놓은 이츠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차가 다 식어버리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인형 아가씨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제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놓치지 말라고. 다시 찾아오는 사람을, 인연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금쯤이면 그리 멀리 가지 않았으리라. 설령 멀어졌다 하더라도 제 손바닥 보듯 빤한 숲이었다. 서둘러 따라잡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다급하게 외투를 챙겨입고 랜턴을 들었다. 붉은 실이 끊어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혹은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매어두고만 싶었다. 있을 리 없는 피가 머리로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츠키는 저택의 문을 잠그는 것도 잊고 정원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 보니 장미꽃의 가시가 제법 거센데, 그 아이는 이것들조차 감수하며 저를 만나러 온 것일까. 대체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좀체 잡히지 않으면서도 목구멍 근처에서 맴도는 단어가 생경해서, 여전히 바람이 뒤흔들고 있는 숲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초행인 이들의 넋을 빼앗기 위해 깊디 깊은 숲이 있는 것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조바심이 나서 견디기가 힘겨웠다. 바라건대 너무 오래 헤매이지만 않았기를. 카게히라가 길을 나선 지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지만 외부와 - 하다 못해 이 저택과도 - 시간의 흐름이 상이한 곳이었다. 랜턴을 고쳐쥐고 숲으로 발을 들였다.
한 발짝을 뗄 때마다 발 밑에서는 낙엽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함께 마치 제가 몰고 온 듯한 느낌까지 들게끔 하는 바람 소리도. 길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막상 들어와보면 옆으로 빠질 만한 샛길이랄 것도 없고, 충실하게 나무 틈새로 걸어가기만 하면 제대로 마을에 도착할 수 있는 구조니까. 진즉 그 아이에게도 알려줄 것을 그랬나,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지레 겁이라도 먹은 건 아닐까. 귓가를 울리는 칼바람과 함께 저택의 주인은 걸음을 한층 빨리했다. 그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공작 씨?"
서둘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자, 뜻밖이라는 듯 바라보는 서로 다른 색채의 두 눈이. 다행히 멀리 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제법 충실하게 길을 따라 걸어와주었다는 고마움이 한데 섞여, 이츠키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여기는 무슨 일이가? 마을에 갈라꼬?"
"너를 찾으려고 들어온 참이었다. 다행히 이 근방을 맴돌고 있었군…. 많이 헤매지는 않았나."
"응, 아까 공작 씨가 준 지도가 있어가 쉽게 걸어왔데이. 근데 내한테는 무슨 볼일로…."
"손가방 말이다. 어제 네가 들고 왔던 사탕 주머니 대신으로, 내가 만들어준다고 했던. 경황이 없어서 빈손으로 보내고 말았다는 게야.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이니, 완성되거든 챙기거라."
"응아아, 그거 기억하고 있었던 기가? 내는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흥, 이 나는 허튼 말은 하지 않아. 발 밑을 조심하면서 따라오거라."
말 끝을 늘리며 난처해하던 것도 잠시, 이내 규칙적인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나란히 이어졌다. 해 떨어지믄 돌아가기 힘들다구 공작 씨가 그러지 않았나? 낙엽 밟는 소리 틈새로 카게히라의 목소리가 용케 이지러지지 않고 들려왔다.
"물론 그렇긴 하다만…. 돌아가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
"응아아앗?"
"무엇을 그리 놀라는 게냐. 어제는 대뜸 결혼해달라 하더니만…. 역시 사윈의 마법은 풀릴 때가 된 것인가."
"응아아, 아이다! 내는 참말로 공작 씨랑 쭉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데이…. 그, 동정하는 기 아이구. 그리고 막상 만나보니까, 억수로 좋은 사람 같아서 더 좋아졌다 안카나. 그래도 내, 이따금 마을에는 보내도…?"
새삼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지 작은 얼굴에 한가득 근심을 머금고 따라온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뒤를 돌아 시야를 맞추며 답해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밤마다 시장에 들르는 게 일과가 되었으니까. 인간을 들이는 이상 네가 먹을 식재료가 떨어져서는 안되지 않겠나. 물론 낮에도 네가 원한다면 내려갈 수 있다는 거다."
"으응…. 다행이데이, 그럼 내랑… 그…."
"…."
"결혼, 해주는 기제?"
"요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좋겠구나. 이제껏 허락의 말을 했더니만, 대체 무엇으로 알아들은 건가."
공연히 오기가 생겨 몸을 홱 돌리고 걸어가면서도 곁눈질로 카게히라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챙기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일상이, 어쩌면 일생이 한층 시끄러워지겠다고 생각했으나 어째서인지 표정은 밝았다. 저택의 윤곽이 보일 즈음 카게히라가 불쑥 이츠키에게 팔짱을 걸어왔다.
"무, 무슨!"
"내 목 마르데이, 드가서 차 한 잔만 내려도."
"뭐, 그러잖아도 차 정도는 대접할 생각이었다만…. 발 밑을 보면서 걸으라는 게야. 넘어지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공작 씨, 정원에 있는 꽃들도 이래 정성스레 가꿔놨다 안카나. 장미 넝쿨도 제때 관리해줬구…. 사실은 누군가 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기제, 응?"
제법 당돌하게 치고 들어오는 인간 아이 - 혹은 제 반려든가 - 의 물음에 잠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제 속을 정확히 꿰뚫어본 발언이었기에. 막연한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던 것이, 저도 모르는 새 인연의 실을 자아낸 것일까. 그리하여 이 깊고도 험한 숲에서도 헤매지 않고 똑바로 저를 찾아오게끔. 이츠키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문도 닫지 못하고 서둘러 달려나갔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인간 주제에, 꽤나 강력한 주술을 걸어놓았다. 혹은 애초부터 이어져있었던 것을 혼자만 모르는 채로 자라났든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카게히라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이끌자, 그새 제 서재의 위치를 기억해두었는지 익숙하게 이끄는 모양새가 퍽 사랑스러웠다.
"차를 내려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저녁을 조금 일찍 차려줄 테니, 점심은 간단히 크로와상으로… 괜찮겠나?"
"응, 괘안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잠깐 쉬고 있으라는 게야. 아, 방에 있는 물건들은 손대도 좋아. 이제…. 네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순간 화악, 하고 얼굴이 달아오를 뻔한 것을 급하게 자리를 피함으로써 겨우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 이래서야 청혼에 당황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지 않는가. 아마도 운명이라는 것의 인력이 예측하기 힘들 만큼 강한 모양이지. 그렇다면 굳이 벗어나려 몸부림 치지는 말자, 인간으로서의 경계마저 넘으며 저를 만나러 온 사람이 있는데. 밀크티 두 잔과 갓 구운 크로와상을 가지고 서재로 돌아와보니 카게히라는 제가 만들다 말았던 손가방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밀크티로 준비해보았다만, 입에 맞는다면 좋겠군."
"응앗, 공작 씨 왔네."
"어차피 네게 주려고 만들던 것이니, 좀 더 살펴봐도 문제 될 건 없어. 아직 미완성이라는 게 흠이지만."
"괘안타, 천천히 만들어주믄 되제."
내는 어데 안 간데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인형에게 숨을 불어넣었던 지난날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카게히라가 이츠키를 가벼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소 어색한 손길이 카게히라의 머리 위를 몇 번이고 가로질렀다.
"인자, 공작 씨가 살아왔던 얘기도 들려주믄 안되나?"
"좋다. 천천히 모두 들려주마…. 단 너도 나와 함께, 아주 오랫동안 살아야만 전부 들을 수 있을 게야."
"응, 내는 좋다. 혼자보다는 둘이 덜 외롭구, 둘이서 같이 외출하믄 즐거운 일이 두 배가 되는 거니까…. 앞으로도 쭉 같이 있자."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 그 말과 함께 이츠키는 제 이백 년간의 생을 가둬두고 있었던 안개가 걷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신이 있다면 이 순간, 이 아이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카게히라의 손을 만지작대다가 문득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나를 찾으러 와줘서 고맙다, 카게히라."
"공작 씨도…. 내를 받아줘서 고맙데이."
"이곳까지 발을 들인 걸 결코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거다."
드물게 바깥의 햇살이 둘의 창으로 스며들어왔고, 악마 공작은 길었던 고독에 이별을 고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둘은 쉼없이 소리 죽인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집 안 곳곳에 사연을 품고 잠들어있는 것들을 깨울까 걱정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동안 이어지던 이야기는 머리 맡의 촛불과 함께 희미한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고, 잠깐의 정적에 카게히라가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우째 됐나?"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내를 만나는 데까지."
"그 다음은…. 지금부터 말해주마. 단, 그만뒀으면 싶을 때는 언제든 이야기해다오."
달빛이 은촛대를 내리비춘다. 얕은 숨소리가 반대편에 삼켜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분명 뛰지 않을 터인데, 이츠키의 심장이 있을 법한 자리에 손을 얹은 카게히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씨, 여기 심장 뛴데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인자 이츠키 씨라고 불러도 되나?"
"시이 씨로도 좋아."
"응. 그라모…. 잘 부탁한데이, 시이 씨."
은은한 장막이 두 사람을 감싸는 가운데, 밤은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카게히라가 천천히 이츠키의 손에 깍지를 끼워왔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듯이. 이미 몇 번이고 붉은 실이 가로질렀을 그 손을 이츠키는 한참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달은 이제 막 떠오른 참이었으며 어둠은 더는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