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rt/슈미카 전력
[슈미카] 꿈꾸지 않는 밤의 녹턴
Rachieh
2018. 5. 13. 00:12
#슈미카_전력
27차 전력 주제 : 동화
* 언젠가, 어딘가의 AU입니다.
이츠키 가(家)에는 몇 대에 걸쳐 가꿔온 큰 화원이 있었다. 집안의 대저택 바로 옆에 자리한 화원은 당주가 바뀔 때마다 관리인 자격도 대물림된다는 설이 있었으나, 정작 바깥의 그 누구도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 벌써 세 대쯤 전의 일이 된 때에,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는 결코 관리 목적 이외에 화원을 드나들거나 타인에게 개방해서는 안된다는 당부가 내려진 뒤 마을에서 제일 가는 부호의 비밀 정원은 사람들의 입방아에만 쉼없이 오르내렸다. 아침에 집안 사람들이 일어나보니 누군가 고의로 침입하려 한 흔적이 남아있었다든가,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모두 무참히 꺾여있었다든가 하는 소문도 돌았으나 이 또한 한갓 입말에 불과했다. 사실상 누구도 실체를 마주하지 못했으니 장미 넝쿨보다도 소문이 더 무성할 법도 했다.
화원의 열쇠는 오직 한 사람, 후계자이자 사실상 가주 역할을 겸하고 있는 남자만이 가지고 있었다. 한때 막내 자리를 도맡아 집안 사람들에게 꽤나 귀여움 받으며 슈 군, 등으로 일컬어지던 이름은 이제 시간에 깎이고 쓸려 어디를 가도 이츠키, 혹은 그저 대저택의 주인쯤으로만 통하는 실정이나 분명 그에게도 이름이라는 게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그 자신도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열쇠를 물려받은 이상 화원을 관리한다. 집안의 철칙이 그러한 이상 별달리 도망칠 방도도 없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선대의 명에 따르는 게 혼을 위로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시월의 날씨만큼이나 서늘하고 때로 날카로운 그에게도 그 정도의 인정은 있었는지 의외로 군말 없이 몇 년째 그 일을 도맡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쳇바퀴 돌듯 무료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정원 가꾸기를 몇 안되는 취미생활로 삼은 것인지도 몰랐다. 종종 자수를 놓곤 했던 그는 실제로 이따금 화원 한복판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바늘 든 손을 놀리곤 했으니까. 정성스레 꽃에 물을 주고 수목의 가지 하나하나를 살필 때의 눈빛에서는 오히려 행복마저 읽힐 정도였다.
외부와의 교류는 최소화하고, 티타임에도 지극히 가까운 친우가 아니면 초대하지 않는다. 외로울 법도 하건만 홀로 묵묵히 큰 집을 지킨다. 언젠가 화원이나 가꾸는 게 무에 그리 즐겁느냐고 넌지시 묻자, 기대되어서, 라고 희미하게 웃으며 답을 돌려주었던 그가 애당초 누구를 기다리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도 하늘에는 반쪽도 되지 못한 달이 걸렸다. 읽다 만 책에 드라이플라워로 만든 책갈피를 꽂아두고, 찻잔을 내려놓은 이츠키 슈가 창 밖을 흘긋 내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떠들썩하던 낮의 소란함이 가신 집 안은 더욱 낯설고 조용했다. 늘 같은 자리에 놓아두던 열쇠를 챙겨 화원으로 향하는 걸음은 다소 경쾌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원의 문이 열렸다. 등 뒤로 문을 닫자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곳곳에 촛불이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달빛이 새어들어오고는 있으나 실내를 비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얇은 카디건 하나만 챙겨입은 터라 간단하게 둘러보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불어올 리 없는 바람이 불었다. 발 밑으로 새하얗게 깔린 꽃들이, 각자의 색채로 피어난 장미 넝쿨이, 몇몇 키 큰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유리를 통해 내다본 밖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다. 카디건을 여미면서 시야를 바로잡던 슈의 눈에, 조금 전의 바람보다도 더 불가사의한 존재가 들어왔다.
꿈인가. 요 며칠간 자수의 새로운 패턴을 익히느라 다소 무리한 탓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한층 강하게 불어오자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놓치고 말았다. 불이 붙어있던 양초는 바닥에 나뒹굴고도 말짱했다. 그리고 지금, 꿈도 환각도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듯 눈앞에 버티고 선 상대는 몇 번이고 눈을 비빈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
눈을 돌려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떠도 사라지지 않는다. 확실하게 꿈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선 채로, 이제껏 갈고 닦아온 어떠한 찬사도 미사여구도 아닌 허망한 탄식만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딱 한 번, 꿈을 앗아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종종 머리맡에 걸어두고 잠들곤 했던, 주술이 걸린 동그란 모양의 그물처럼 나쁜 꿈을 몰아내주는. 악몽을 지우고 행복한 기억만을 간직하게 해주는, 신화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들이었지만 어린 마음에 무턱대고 믿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랬기에 지금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지. 슈 군, 기억하렴. 할아버지께서는 너를 무척이나 아끼셨어. 네가 이따금 소리내어 울거나 잠투정을 할 때면 누구보다도 먼저 너를 달래주곤 하셨단다, 더없이 기쁜 얼굴로 말이야. 또 그건 이미 심장 깊은 곳에 자그만 흔적 정도로만 남은 누군가의 습관을 물려받아서인지도 몰랐다. 공을 차기보다도 정원에서 누이와 함께 책 읽는 걸 더 즐기던 저의 손을 잡고 화원의 문턱을 넘었다는 때의 기억이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목도하셨다는 그 존재를.
신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순간 실체를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순간,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 저택 근방에는 예로부터 꿈을 뿌리는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구든 한 번 눈에 담은 뒤로는 그 모습을 잊지도 떨치지도 못하지만,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즉시 흡사 주술의 흔적과도 같은 황금색 날개 가루를 남겨둔 채 사라지고 만다. 홀린 듯 눈부시게 빛나는 가루를 손 끝으로 쓸면, 그게 누구라 해도 한평생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꿈 같은 이야기는 이 순간에도 저택 바깥에서 소란하게 읊어지고 있을 것이 뻔했지만, 이츠키 슈는 이야기의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눈앞의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축을 뒤흔들 만큼 거세게 불던 바람이 마침내 멎은 자리에 남은 것은 슈의 기나긴 한숨이었다. 안도의, 혹은 작게나마 붙들고 있던 동심과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
"…거짓말이 아니었군. 정말로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
"이제껏 내가 속아온 줄만 알았다. 집안의 어른들을 원망한 적도 많았지…. 이 고리타분한 저택을 맡기로 한 것도 모두 이 화원에 얽힌 전설 때문이었어."
"…."
"보다시피 나는 이츠키 가의 사람이다만, 이번에도 사라질 텐가?"
말이 되지 않는 물음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뜸 던진 질문에 상대는 고개를 잠깐 갸웃하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쑥 손을 뻗어 랜턴을 떨군 자세 그대로 굳어있던 오른손을 감싼다. 이쪽으로 고개를 숙이자 검푸른 머리칼이 쏟아질 듯 기울었다. 달빛을 받아 선연히 발하는 빛은 청록에 가까웠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균형도 맞지 않는 두 눈동자가 한순간 휘어지며 웃는다. 분명 보름은 아닌데도 공연히 환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눈앞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존재와 맞닥뜨렸다. 순백의 깃털로 된 날개를 달고 있지도 검은색 창을 쥐고 있지도 않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한 가느다란 체구의 소년.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도 않을 그와의 만남을 슈는 이제껏 기적이라 회고했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차를 내어오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뜻밖에도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모양이기에 잠깐 들렀다 가겠느냐고 묻자 상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신화 속의 넥타르 같은 것은 구비해두지 않은 터라 찬장에서 홍차 티백을 꺼냈다. 찻잔을 내려놓자 한참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고맙다며 작게 한 마디를 떼어놓았다. 귀에 익은 듯도 한 억양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까지 터져나왔다.
"말까지 할 줄 알았나."
"응, 항상 당신들이 하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어째서 좀 더 일찍 나타나지 않았지?"
"내는 줄곧 저기 있었데이?"
구름이 끼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 밖을 향해 소년이 긴 손가락을 뻗었다. 아마도 화원이 자리하고 있을 곳을 지레짐작하는 것이리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루에 두 번, 이따금 종일 저곳에 자리를 펴고 있는 제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보석과도 같은 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살짝 웃어보인다.
"으응, 그야 그동안은 지금처럼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서 이츠키 씨가 못 알아봤을 기다."
"…?"
"내는… 나비 씨나, 파랑새 씨 같은 동물들의 몸을 자주 빌렸데이. 사람들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건 없구… 그래도 이쪽은 안전하다캤다. 이츠키 씨, 당신 집안 덕택에."
"그건 무슨 말이지?"
"아, 지금 생각을 읽혔다고 생각했제? 우리는 옛날부터 사람들 눈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카나. 그래도 물론 나쁘게는 안 하구, 티도 거의 안 낼라카는데, 우리는… 사람들의 나쁜 기억을 숨기는 걸 업으로 삼으니까, 자주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데이."
그때 도와준 게 당신 집안의 사람들이구, 그게 벌써 당신은 태어나기 한참도 전의 일이니까…. 에헤헤, 내는 잘 기억도 안 난다. 아무튼 그때 보답으로 안 좋은 꿈을 전부 가져갔었던 기라. 홍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한 마디씩 느리게 덧붙이던 이가 말을 마치고 나자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래서 돌아온 기다, 이츠키 씨."
"…슈."
"응?"
"나는 이츠키 슈라는 게야. 용케 성씨만큼은 기억했구나."
"그야 잊어버릴 리가 없으니까…? 내는 그럼 슈 씨라고 부를게. 내 이름은 미카라고 한데이, 카게히라 미카."
그림자의 조각(影片)이라, 퍽이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낯선 울림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 몇 번씩 입 안으로 굴리다가 차와 함께 목 뒤로 넘겼다.
"…줄곧 악몽을 꿨었다."
"…응…?"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물론 요즘은 조금 덜해진 것도 있지만… 네 존재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도, 밤이면 온갖 유쾌하지 않은 것들과 맞닥뜨렸어. 그래서 방에는 주술용품도 걸어두고 잠들기 전에는 기묘한 소설책을 멀리하는 등 다방면으로 손을 써봤는데도, 소용이 없더군."
"…."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린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귀에 못이 앉도록 너에 대한… 너희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어쩌면 세뇌와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사 고해하자면 커다란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가업을 물려받을 위치도 아니었거니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도 좋다는 말까지 들었다. 필요한 건 거의 뭐든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성탄을 앞둔 날이면 꼭 기도를 하다가 잠들곤 했었다. 내일은, 내일은 꼭. 하다못해 밝아올 새해에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건 단지 꿈 없는 밤이 부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몸을 쓰는 놀이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집 안 곳곳의 물건들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기 일쑤였던 소년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인형과 이별한 뒤에도 품에 끌어안은 환상 하나만큼은 놓지 않은 청년으로 자라났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반짝이는 존재를 다시 눈에 담고 싶다. 이 세상의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라 해도 좋았다. 뻗은 손이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도 상관 없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마음 속으로만 품어온 동경은 차라리 첫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상대는 눈앞에 있었다. 원한다면 사라지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될 때까지 곁에 있어주겠노라고.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후로 매일매일이.
낮에는 주로 화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차를 내오면 과자와 함께 쟁반에 담아두고 서재에 한가득 꽂힌 책을 한 권씩 꺼내 읽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무료해졌는지 수도 없이 보았을 꽃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리 신기하느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면서 뭐든지, 라고 답한다. 꽃의 종류라도 늘려야 하나, 어떤 걸 좋아하는지 물어라도 볼까…. 속으로 이어지는 생각이 들키지 않게끔 재빨리 눈을 돌리는 저택의 주인을 소년은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 전에 새로 심은 묘목만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는 퍽 익숙해진 억양이 귓가로 파고들었다.
"하나도 안 변했데이."
"…?"
"그 머리카락이나, 눈이나… 달라진 건 키밖에 없구."
따라붙으려던 의문이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여과 없이 투영된 무구함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산산이 깨어졌다. 땅에 떨어진 꽃 가지를 주워놓고도 꽃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마른 가지만 만지작대는 손가락이 하얗다. 나를, 기억하고 있었나? 긴장이라도 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것은 이미 다 자라버린 청년이 아닌 꿈에도 천사 같은 얼굴을 그리던 소년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시야에 비치던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응,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슈 씨가 날마다 와줘서 참말로 기뻤다."
낯선 곳에 둥지를 튼 뒤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인간들은 위험하니까 제대로 피해다녀야 한다, 특히 나이가 어리면 장난기가 심해서…. 익숙하게 들어온 말들이었다. 흔적을 감추는 데는 익숙했고, 낯설고 신기한 풍경에 조금 더 취하고 싶더라도 그들이 놓아둔 덫이라도 있을까 재빨리 모습을 바꾸거나 자리를 떠야만 했다. 왜 우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데도 이렇게 숨어살아야만 하나요? 언젠가 건넨 물음에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해주었다. 그건 말이지, 미카가 좀 더 자라면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인간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단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존이라는 건 원래 한쪽이 한쪽을 필사적으로 피해다니고, 한쪽이 한쪽을 장난삼아 멸하려 들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던가. 우리는 이렇게나 서로 닮았는데, 어째서. 결코 그들과 온전히는 닮지 못할, 서로 다른 색의 두 눈동자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도 어지럽고 난해했다. 그래도 인간들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거나 우리만큼 빠르게 이동하지는 못하잖니? 역시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척을 지고, 넘지 못할 벽을 세우고. 결국에는 모두 똑같은 것을.
이따금 새나 나비의 형상을 하고 있을 때도 그랬다. 좁은 그릇은 갑갑했고 서둘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어느 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서 사람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고 싶었다. 거리가 조금이라도 좁혀질 것 같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들보다도 가뿐히 착지해 그들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 모습을 감추는 것으로 짧은 장난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쁜 꿈을 없애, 선물인지 재앙인지 모를 것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날도 그랬다. 섞이고 싶은, 통성명을 하고 얼굴을 익히고 싶은 존재. 필연적으로 거리를 둬야만 하는 존재…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생활은 이제 익숙했다. 분명 이번에도 똑같겠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거든 꿈만 앗아서 자리를 떠버리자. 이 집은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모두 허울 좋은 거짓말일 테고…. 하늘에는 초승달이 창백하게 걸려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뒤이어 문이 열렸다. 나이가 제법 지긋해보이는 노인은 손자로 보이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바쁘게 허공을 휘저었다. 낮에 먹은 사탕의 색과도 퍽 닮아있는 눈이었다.
아무래도 그 집에 뭔가를 두고 온 모양이라고, 나비의 날개보다도 현란한 흔적을 남겨두고 떠나온 뒤로 미카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을 앓았다. 상사병이라고들 이야기했다. 마음을 두고 온 것이라고 다들 한 마디씩 얹었다. 유실물을 찾기 위해 다시 그 저택으로 날아든 것은, 그때 보았던 소년이 훌쩍 자라 저보다도 웃도는 눈높이를 갖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모든 걸 꿰뚫어보고 싶다는 듯 예리하게, 허나 결코 무정하지는 않은 시선으로 화원 안을 둘러보던 눈은 어느새 올곧은 빛까지 띠고 있었다. 눈매는 다소 날카롭지만 제때 부드럽게 휘어질 줄 알았다. 포도맛 사탕을 볼 때마다 공연히 떠올라 즐겨먹던 사탕조차 멀리하게 만들었던 그 눈으로 이쪽을 건너다 보며,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다른 답을 내려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얄궂게도, 그때의 나는 네가 남겨두고 간 가루의 흔적조차 볼 수가 없었다. 어른들의 배려였을지도 모르지…. 아이들은 이런저런 꿈을 꾸면서 자라는 법이고, 일찍이 많은 걸 막아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으응, 그랬구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데이. 내를… 우리를 본 사람들이라면, 꿈자리가 나쁠 리가 없는데, 당신은 화원을 관리하러 들를 때마다 나쁜 꿈을 꾼 안색이어서."
"그것까지 보이는 건가?"
"눈빛부터, 머릿속까지.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안카나. 아, 그리고 또 다른 생각도 하나 발견했구."
"그건 무엇이었지."
"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각설탕을 건네주던 손이 순간 허공에서 멎었다. 망설이는가 싶더니 못 이긴 듯 웃어보인다. 난생 처음으로 인간의 온기를 깨달은 이가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기쁜 듯 미소지었다. 속는 셈 치고 되돌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끝나지 않는 생에서 이보다 더한 기쁨을 찾기란 어려울 거라고, 좋을 대로 판단한 두 눈동자가 꿈이라도 꾸는 듯 들떠있었다.
그리고 다시 밤이었다. 자수를 두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기 일쑤였던 하루의 끝자락이 사뭇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밤이면 미카는 곁에서 노래를 불러주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 혹은 들꽃이나 작은 동물들의 이야기였다. 슈 씨는 저쪽 산에 가본 적 있나? 초입에는 벚나무가 억수로 많은데, 봄만 되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데이. 벚꽃은 원래 봄에 피는 꽃이긴 해도, 그래 활짝 피는 데는 많지 않을 기라. 그러고 보니까 슈 씨 머리 색이랑도 많이 닮았구…. 조심스러운 손 끝이 살짝씩 머리칼 근처를 맴돌았다. 평생 꽃 하나 제 뜻대로 꺾어본 적 없을, 필시 앞으로도 그러할 손을 저도 모르게 맞잡았다. 잠깐 갈 곳을 잃었던 반대편 손이 익숙하게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그새 귀에 익은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얼핏 머나먼 어린 시절에 들었던 곡조와도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
악몽을 없애고 달콤한 기억만을 남겨두는 평생에 걸친 속임수, 사랑스러운 장난의 상징 그 자체였다. 어째서인지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 슬슬 졸리나? 불 끌까?"
"아니, 네가 잠드는 건 봐주겠다는 게야. 아직 그렇게까지 졸리지는 않고…."
"많이 졸린 것 같은데… 알았데이."
소리죽여 웃고는 잠시 끊어졌던 곡조를 이어붙인다. 눈앞의 풍경이 -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노래, 연신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유리구슬 같은 두 눈동자가 천천히 점멸되었다. 잘 자라, 슈 씨. 오늘은 분명 좋은 꿈만 꿀 수 있을 기다. - 그래…. 아침에 보자꾸나. - 응, 아침에……
창가에서 새가 울었다. 모처럼 편안하게 눈을 뜬 이츠키 슈가 몸을 일으켰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으며 커튼을 열어젖히기 무섭게 이른 오전의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들어왔다. 아침이었고 방 안은 언제나처럼 한산했다. 공기는 차갑지도 그리 덥지도 않다.
어쩐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명 아주 좋은 꿈을 꾸었던가…. 누군가의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감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탓에,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내려보지만 사고가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언젠가 들었을 법한 곡조가 말이 되어 나올 듯 말 듯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을 끄집어내려 애쓰지만 허사일 것을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다. 사물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티타임을 위해 차를 끓일 때마다, 화원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기억해내지 못한, 기억하지 못할 이름이 급하게 삼킨 세 시의 스콘처럼 가슴을 답답하게 할 것을 안다. 그럼에도 영문도 모른 채 웃게 될 것을, 앞으로의 생에서 두 번 다시 어두운 꿈은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창가에는 다만 나비가 앉은 모양새로 황금빛 가루가 흩어져있었다.